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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곳독서 Sep 23. 2020

7시간 레고를 조립하며 깨달은 것.

부제_시간과 공간의 방

아들은 레고를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로 표현하자면, 레고 매장에서 받았던 카탈로그를 한동안은 잠잘 때도 항상 머리맡에 두고 잤다. 조금 더하면, 레고 카탈로그에 있는 제품명을 읽으면서 한글을 배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동안은 “아빠, 다음엔 무슨 레고를 살까?”, “아빠, 여기 와서 카탈로그 같이 보자.”, “아빠, 어벤저스가 좋아? 해리포터가 좋아?” 등 모든 대화의 주제가 레고였다. 그러다 보니 레고를 한 달에 한 개 정도는 산다. 레고 스피드 챔피언(자동차 시리즈)은 최근에 나온 자동차 모델을 대부분 구입했다. 다음은 어벤저스 시리즈 그리고 최근에는 아빠의 사심이 작용해서 해리포터 시리즈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기 나이를 훌쩍 넘어서는 레고를 조립할 경우, 5살 아이의 집중력은 얼마나 될까?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자면 '20분' 정도다.(물론 개인차가 있을 수 있다) 레고는 제품별 조립 설명 매뉴얼이 번호 순서대로 자세하게 되어 있는데, 이 번호를 기준으로 20번 정도까지 하고 나면 다음은 아빠의 몫이다. “지금부터 아빠가 해요.”라고 쿨하게 말한 후에는 옆에서 내가 만드는 것을 구경하고 감시도 한다.


시간과 공간의 방


레고를 조립하는 장소를 부르는 나만의 애칭이다. 일단 조립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끝날 때까지 아들은 옆에서 아빠를 지켜보고 있다. 지칠 때면 힘내서 열심히 계속하라는 듯이 꼭 안아주고 간다. 그럴수록 이 방에서는 휴식도 탈출도 불가능하다. 별생각 없이 매뉴얼대로 조립하고 있으면 시간이 순삭 된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시간과 공간의 방이라 부른다.


최근에 읽은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라는 책에서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청소나 빨래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레고를 조립하면서 그 의미를 깨닫는다.

글을 쓰다가 막힐 때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하는 일이 일종의 의례거든요. 이 시간이 왜 소중하냐면 아무 생각 없이 멍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이에요. 역설적이지만 사실이에요.(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238쪽)


7시간 동안 레고를 조립한 이유


이번 주는 레고 시리즈 중에서도 튼튼하고 디테일한 ‘레고 테크닉’ 시리즈 중에서 자동차를 샀다. 우리나라엔 품절이어서 해외 주문해서 2달만에 받은 제품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레고를 조립하다 보니 레고 매뉴얼만 보면 대략적인 소요 시간이 계산된다. 조립 매뉴얼에는 친절하게 '1, 2, 3... 200” 숫자가 적혀있다. 아들과 함께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만든다는 것을 가정하면 50번까지 조립하는데 대략 1시간 정도 걸린다. 이번에 받은 것은 200번이 넘어가니까 4시간 정도 걸릴 것을 예상했다.


토요일 오후 5시. 조립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아들과 함께 만들어서 속도가 늦다. 그래도 옆에서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귀여운 아들의 볼을 바라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오후 6시. 아들은 이제 관찰자이자 감독이 되었다. 아빠가 만들고 있는 것을 잘 보다가 가끔 와서 한 번씩 안아준다. “아빠 고마워. 하지만 조금 더 서둘러야지.”라는 마음이 보인다.


오후 8시 30분. 이제 180번대가 넘어간다. “레고 테크닉 시리즈는 역시 시간이 많이 필요해.”라고 시간과 공간의 방에서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제는 아들은 옆에 없다. 나 혼자와의 싸움이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다. 후면 라이트와 바퀴만 달면 끝이다!라고 생각한 순간 작은 부품 하나가 반대로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이걸 잘못 끼웠네. 바꾸면 되지.”라고 말하고 빼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걸 바꾸어야 할 부품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레고는 야박하게도 여유분의 블록을 주지 않는다. 정확히 매뉴얼에 나와있는 블록들이 오차도 없게 들어있다. 아... 정말 정 없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부품을 찾지 못하고 이제 매뉴얼을 반대로 넘기면서 하나씩 보기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170번대에서 100번대로 넘어갔는데도 없다. 이쯤 되면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레고에서 부품을 하나 정도는 잘못 보내준 게 아닐까라는 생각한다.


그때부터 반 포기 상태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래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레고에서 잘못한 거야. 이걸 어떻게 마무리할까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39번에서 비슷하게 생긴 부품을 내가 잘못 끼운 것을 발견했다. 유레카! 하지만 유레카는 찰나다. 이 작은 부품을 어떻게 꺼내지? 다시 39번으로 역주행해야 할까?


다양한 시행착오


오후 9시 30분. 예상했던 4시간은 넘어갔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되어감을 인지한 아들은 아빠를 떠났다. 벌써 3~4번은 확인하러 왔어야 했는데, 오질 않는다. 아빠의 실패를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자리를 떴을지도 모른다.


오후 10시. 계속해서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잔머리를 굴려보았지만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 크게 바꾸지 않는 방법을 고민했다. 39번까지 돌아간다면 2시간 정도는 다시 조립해야 한다. 손가락이 아파서 다시 2시간을 조립할 용기는 없다.


그래서 조금씩 떼어내 본다. 레고는 만들 때마다 그 정교함에 놀라지만, 테크닉 시리즈는 튼튼하기까지 하다. 하나하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디테일하게 만든 거야.” 원망은 레고 엔지니어에게 돌린다.


덮개를 제거하고 힘으로 조그만 블록 하나를 당겨본다. 미동도 없다. 이러다가 블록이 아니라 손톱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구세트를 가져온다. 이론은 아주 쉽다. 39번에 있는 막대를 쭉 빼낸 다음에 문제의 그 블록만 바꾸면 된다. 생각보다 빨리 끝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에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레고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있었다. 펜치와 일자 드라이버를 들고 양쪽으로 살짝 당겼는데, 움푹 파인다. 조금 더 시도하면 플라스틱이 깨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패다. 여기서 중단.


소소한 깨달음


오후 10시 30분. 레고 조립을 시작한 지 5시간 30분이 지났다. 아들은 얼굴에 서운함이 가득하지만, 내 얼굴에 좌절감이 더 가득했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을 자러 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 가슴이 아프다. 일단 미련을 버리기로 하고 레고 만들기를 멈추었다.


아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서 자려고 누웠다. 얼마나 오랜 기간 기다려서 받은 레고인가. 어린 나이에도 그 아쉬움을 아빠에게 표현하지 않는 모습에 다시 문제의 그 39번 블록이 떠오른다. 아들을 안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나 : “아빠가 미안해. 다음부터는 매뉴얼을 더 잘 보고 조심히 만들어줄게.”
아들 : “응. 그러니까 어려운 걸 만들 때는 잘 보고 조심히 천천히 만들어야지. 급하게 만들면 안 돼.”  


아. 5살 아들이 꼭 안아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느낌이 다르다. 진리를 알려주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오후 11시 30분. 여기서 끝낼 수 없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아들이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일념으로 역순으로 분해를 시작했다. 다행히 조립을 해 둔 큰 덩어리들로 분해되는 부분이 있어서 조립할 때보다는 시간이 적게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모델번호 6135088 블록을 만났다. 반갑다 블록아.


새벽 01시 10분. 7시간 넘게 시간과 공간의 방에서 수행한 레고 조립이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만들어본 레고 중에 가장 오랜 시간을 들인 작업이었다. 물론 앞으로는 더 어려운 레고 작업들이 기다릴 것 같지만.


7시간 이상을 레고를 조립하면서 깨달은 점

1. (아들의 말처럼) 천천히 매뉴얼을 잘 보자.

2.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잠시 내려두고, 천천히 생각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3.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고 하다간 더 큰 문제가 찾아올 수 있다.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이 아쉽더라도 올바른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빠른 회복의 길이다.


마지막으로 레고 회사에게 건의하고 싶은 것을 적어본다.

여유분의 블록을 넉넉히 챙겨주세요.

혼동하기 쉬운 블록은 만들지 마세요.


그래도 튼튼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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