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누스 차이트블롬은 1883년생으로 글을 쓸 당시 예순 살의 나이이다. 그는 약국을 하는 가톨릭 신도의 집안 장남이었다. 유복한 환경 속에 충실한 교육을 받고 자란 세레누스에게는 헬레네라는 고전적인 이름의 아내와 엄마의 이름을 물려준 사랑하는 딸이 있다. 또 나치 정권에 충실한 두 아들과는 다소 서먹한 사이이다. 뮌헨의 은퇴한 인문학자라는 언급, 또 딸에 대한 애정은 장녀 에리카 만(Erika Mann)을 끔찍이 아꼈던 토마스 만 자신과 『베네치아에서 죽음Der Tod in Venedig』의 주인공 구스타프 아셴바흐를 떠올리게 한다. 아셴바흐는 교과서에 자신의 소설이 실릴 정도로 명망 있는 작가로 그려진다.
두 친구의 고향인 튀링겐의 작은 도시 카이저스아셔른(Kaisersaschern) 인근의 시골 풍경이 묘사된다.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 카이저스아셔른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타라’와도 같이, 소설 내내 가장 중요한 지명 가운데 하나이다. 아드리안은 부헬 농장을 경영하는 마을 유지의 둘째 아들로, 피나무(‘Linde’는 보리수가 아님)가 있는 집에서 188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요나탄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형적인 독일인으로, 성서와 자연과학에 대해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원소와 나비, 성에, 빛의 굴광성 따위에 대한 그의 관심은 괴테의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 곧 ‘원형식물론’(Urpflanze)이나 ‘색체론’, ‘광물론’을 연상케 한다.
‘헤테라 에스메랄다Hetaera Esmeralda’라는 나비에 대한 탐구는 뒷날 아드리안이 만나게 되는 매춘부를 예고한다. 이 나비는 고약한 분비물을 내서 잡아먹는 순간 뱉지 않으면 안 되는 종이다. 아버지 요나탄은 돋보기를 가지고 유리창에 서린 성에를 관찰하는 것도 좋아했다. 마치 자연계의 원형인 듯한 성에를 관찰하는 모습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과학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드리안의 어머니요 부헬 농장의 여주인인 엘스베타는 남편에 어울리는 소박하고 기품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듣기 좋은 메조소프라노의 음성이었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음악가가 될 아드리안의 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아드리안과 같은 예술가에게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각별하다. 다만 세레누스는 아드리안이 예술가 기질과 시민 기질의 대립을 강조하는 허풍이 심한 낭만주의자는 아니었음을, 오히려 그것을 경멸하는 쪽이었음을 지적한다.
어린 시절 부헬의 인상은 아드리안이 성인이 되어 자리 잡고 창작의 거점으로 삼는 파이퍼링의 모습도 좌우한다. 파이퍼링의 모습은 부헬 농장을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할 정도로 유사했다. 차이라면 피나무 대신 느릅나무가 있었다는 정도였다. 심지어 ‘발푸르기스’라는 희한한 이름의 하녀 또한 부헬 농장의 지저분한 ‘한네’를 떠올리게 했다. 한네는 어린 소년들에게 매우 중요한 음악적인 체험을 하게 했다. 그녀의 지휘 아래 부른 민요들은 아드리안이 처음으로 폴리포니, 곧 ‘다성음악’을 접하는 기회였다.
세레누스는 돌림노래를 통해 다성음악을 경험하던 아드리안의 태도에서 특유의 냉소적이고 어쩌면 섬뜩하기까지 한 성격을 기억해 낸다. 그것은 “이 정도 수준의 다성음악 정도야 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듯한 태도였다.
스트라빈스키는 1936년에 자서전 『내 삶의 연대기Chronique de ma Vie』를 내놓았다. 첫 기억으로 그는 유년시절 추레한 벙어리 노인이 길에서 저속한 소리를 내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다가 부모에게 혼났던 기억을 말한다. 토마스 만은 스트라빈스키의 이 추억이 자신의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