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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경 Feb 08. 2023

29살 크리스마스의 구조조정

홀리데이 블루스 (Holiday Blues)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고 예상 밖의 일이 발생했어도, 일단 골인해버리면 모든 것은 깨끗이 자취를 감추고 만다.”

‘고통스럽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스포츠에 있어서는 전제 조건과 같은 것이다. 만약 심신의 단련에 필요한 고통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일부러 트라이애슬론이나 풀 마라톤이라고 하는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 스포츠에 도전할 것인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의 성질은 성적이나 숫자나 순위라고 하는 고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그 자체 속에 유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 다다를 수 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2022년 12월 16일,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금요일 오후 4시



구조조정 발표



완전히 예감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설마설마 했지만, 진짜로 올 진 몰랐다.


1년 전, 5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꽤나 큰 포부를 가지고 런칭 브랜드 MD로 이직하였다.

21년도에 대기업 유통망을 바탕으로 소프트 런칭을 한 패션 브랜드로, 국내 라이센스 생산과 글로벌 제품 수입을 병행하여 진행하고 있었다.


본격 런칭은 22SS 부터 였는데, 그러니깐 겨우 1년 만에 사업을 잠정적 보류한다는 것이다.


경제뉴스 기사에도 버젓이 소식이 전해졌고,

회사는 ”브랜드를 중단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 물량을 줄인 것 뿐“이라고 대응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장 2주 만에 같이 일하던 디자이너, 생산, 마케팅팀 동료들이 권고사직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조금 더 버티던 사람들도 한 달 사이에 퇴사하게 되었다.


대기업에 속했지만, 작은 브랜드 작은 조직이었던 만큼 11명 남짓한 동료들과의 연결감은 끈끈했다. 성장 욕구가 많았던 또래 동료들과 자기 브랜드 마냥 똘똘 뭉쳐 작은 성과들을 만들어 가는 중이었고, 언젠가는 터지겠지 라는 마인드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일했었다. 그랬기 때문에 상실감은 더 오래갔다.


사람들과 이별하는 것이 두렵고, 나 또한 불안한 고용 형태에 우울감에 깊이 빠졌다.




Holiday Blues (홀리데이 블루스)


스트레스, 불면으로 인한 피로, 햇빛의 부족, 재정적인 압박, 상대적 박탈감을 포함한 많은 요인들로 우울과 충격에 빠진 채 2022년 연말과 2023년 새해를 맞이했다.



연말연초에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았지만 결국 약속 장소에 가지 못했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 하는 게 힘들었다.



”너 정도 경력이면, 어디든 갈 수 있지 않아?“ 라는 격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건네는 인사이자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당시에 겪고 있던 불안 상황에서는


글쎄… 그래, 옮기는 건 문제 되지 않는다만, 

그 다음엔 어쩌지?


말 그대로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 달 반 정도를 방황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했다. 글쓰기와 운동. 갑작스런 불행에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하던 걸 하기로 했다.


틈이 나는 대로 다이어리와 아이폰 메모장을 빼곡히 글을 썼다. 퇴근을 하면 수영을 했고, 영하의 날씨에도 해가 떠 있을 땐 달리기를 했다.

2023년 1월 1일 한강 달리기 15K 뚝섬 유원지 역 - 잠수교 중간지점 왕복



특히, 수영은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다. 물살과 하나 되어 몸을 완전히 쫙 편 상태로 겨울이라 조금은 미지근한 물 속을 헤엄쳐 나가는 건 돌고래처럼 웃는 느낌이다.


영하 17도(체감온도는 영하 26도)의 날씨에 퇴근하고 수영을 가는 건 꽤나 큰 결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쁜 수영복을 샀다.



하던 걸 하고, 속도를 늦추고 머릿속을 정리하고 나니 내가 가야할 길이 점점 보였다.


불안감으로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은

다시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건강한 생각과 정신으로 균형을 찾게 되자 점차 빠르게 흘렀고,


지금은 왠지 ‘모든 일이 잘 되어갈 것 만 같아’ 라는 근거 없는 낙천적임에 이르게 되었다.




춥디 추웠던 연말연초는 어느새 지나가고, 지난 주 토요일이 입춘이었다.


뚱뚱한 아저씨 고양이가 살고 있는 강원도 고성의 에어비앤비로 주말 여행을 왔다.  

따듯한 햇살이 비추는 큰 원목 식탁에 앉아 정성스러운 아침 식사를 하고, 주인 부부와 두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었다.


집으로 돌아 가는 길에 생각이 들었다.

“하... 다 지나갔구나.”



불안과 우울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와 응원을 보냅니다!


다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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