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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리 Mar 26. 2020

제3부 6화 부분 관해를 버텨내는 힘-거식증이란 타이틀

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거식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주변에 알리고 섭식장애를 중심으로 약물 처방과 상담을 두루 받은 지 년수로 4년이 되었다. 


 8화에서 관해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섭식장애를 앓아온 십몇 년의 세월 동안 나 역시 수 없는 부분 관해를 겪어왔다.

https://brunch.co.kr/@aiyouri/14


 관해의 기간을 잘 버티고 버텨 완치의 길로 들어설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과정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다시 나를 학대하는 행위를 선택하는 것은 건설적인 행동에 비해 쉬웠고 몸에 익어 익숙했다. 마치 정성 들여 차린 한 끼 밥보다 레토르트 식품이 간편하듯 더 손쉬운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다.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만족감을 느끼다가도 한 순간에 스스로를 쓰레기 취급하기 일쑤였다. 더 이상 세상의 기준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사람이 될 거라고 매일 기도하고 다짐함에도 타인들이 말하는 외적 기준에 귀를 쫑긋 세우곤 했다. 건강한 내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가 하면 체중이 증가한 내 몸이 역겹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고, 살이 오른 게 예쁘다는 지인의 말에 내 노력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가 하면 생기 있어 보인다는 말에 지금 살쪄 보인다는 거냐고 따지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악순환과 쳇바퀴 같은 굴레에 좌절하라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렇게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더라도 나는 다시 건강한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 또한 배웠다는 것이다. 넘어지더라도 나는 삶의 연장선 속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다. 넘어지는 일 또한 내게 하루이고 한 발자국이다. 끝없는 내 마음의 양가감정 속에서 무엇보다도 나는 다시 건강하고 나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릴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결국은 완전히 섭식장애를 극복한 내가 될 거라는 믿음과 희망 말이다.


 30년 가까이 고통을 느끼면서도 제대로 된 치료는 하지 않은 채 상처를 곪게 만들었는데 겨우 몇 년, 간신히 돌봐 주었다고 나아진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대단한 일이지 않겠는가.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내 완치에 방해가 되고 어떤 순간이 나를 바닥으로 내모는지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무너졌던 순간과 비슷한 상황이 나를 덮쳤을 때 지난날과 똑같이 당하고만 있고 싶지 않았다. 마음으로 전부 이겨낼 수 없더라도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나름의 매뉴얼을 만들어 나를 지키고 싶었다. 


 내 경우는 크게 5가지의 상황에서 주로 무너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1. 남들의 기준.

 많은 사람들이 내게 살찐 모습이 더 생기발랄하고 예뻐 보인다고 말해준다. 그것은 정답이다. 삼십 킬로그램 대의 나를 보며 "지금 예뻐."라는 건 사실도 아니며 내게 도움도 되지 않는다. 체중 증가가 내게 답이니까. 그러나 개중에 확실한 수치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40kg은 넘어야지. 43kg도 말랐어. 너 키에 47kg 까지는 쪄도 돼. 47kg 까지는 찌우자. 내가 정말 별로 같아 보이면 딱. 말해줄게."

 이런 말을 들으면 머리가 하얗게 된다. 그 수치 또한 하나의 기준이 된다는 걸 저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른다. 그것은 또 다른 억압과 강박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 기준이 지금의 내 기준보다 느슨한 것뿐이지 결국 체중계의 숫자에 속박당하는 것은 같다. 


 이럴 때 나는 귀를 닫고 마음속으로 "저건 저 사람의 기준일 뿐이야. 내가 원하는 건 또 다른 숫자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야."라고 외친다. 무엇보다 다음 말을 되뇌고 되뇐다. 

나는 건강해지려고 증량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눈에 예뻐 보이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목표는 아름 다고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 외적으로 예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상대에게 위의 말들을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또 가끔은 친절과 선의를 가장해 당신의 기준을 내게 강요하지 말라고 속으로 욕하기도 한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 중에 자신의 몸매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었기에.


-2. 연예인들의 외모 평가.

 카페나 대중교통 등 공공장소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연예인 평가가 얼마나 내 귀에 쏙쏙 들려오는지 모른다. 지인들은 나를 배려해 조심해주는 눈치지만 (고마워요.) 무방비 상태에서 듣거나 읽게 되는 연예인 외모 지적은 언제나 날 힘들게 해왔다. 예전에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역시, 살을 빼야 해. 더 빼야 해. 저 봐... 내 눈엔 저렇게 날씬한데 사람들에겐 저 다리조차도 뚱뚱한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십거리가 된 연예인을 실제로 본다면 얼마나 날씬하고 마른 몸을 지녔을지 내가 다 변호를 해주고 싶을 정도로 성장했다. 인간이 아니길 바라느냐고! 한번 저 연예인 몸무게의 근처까지라도 가 본 적은 있느냐고 따져 묻고 싶다. 더불어 연예인은 외적으로 보이는 직업이고 외모를 가꾼 노력을 물질로 보상받지만, 

나는 일반인이다. 나의 가치는 외모에 국한되지 않는다.


-3. 거식증? 네가?

 가장 할 말이 많은 파트이다. 관해를 겪을 때 가장 도움이 안 되며, 가장 날 무너트리기 쉬워 가장 멀리해야 하는 부분. 정말 많은 힘을 들여 날 지켜야 하는 순간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섭식장애를 주제로 상담을 받으러 다녔는데 그곳에서 마저 상담사는 이렇게 말했다. 

"거식증이세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그 상담사가 어떤 의도를 갖고 한 말이었든 나는 저 말에 몇 주를 힘들어했다. 상담사의 대사가 저 정돈데 다른 사람들의 말은 더 지독하게 날 괴롭히곤 했다. 부분 관해를 겪고 있을 때는 어렵고도 어렵게 증량한 내 몸을 받아들이는 게 가장 힘든 작업이다. 겉으로는 예전에 비해 건강해 보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여전히 칼로리를 계산하고 뒤에서 몰래 운동을 하고 밤마다 칼로 지방을 도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여전히 힘들고 아픈데 여전히 지옥 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말이다.

안 아파 보인다. 거식증? 말라 보이지 않는데. 섭식장애로 상담받고 싶으신 게 맞으시죠? 아 그동안은 꽤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입고 오신 걸 보니 정말 마르셨네요. 오늘 보니 정말 거식증 같아요.(말이야 방귀야?) 겨우내 수면 잠옷 위에 청바지를 입고 병원을 방문하다 치마를 입고 가자 살이 갑자기 엄청 빠지셨네요? 기타 등등. 

 그동안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말을, 내 고통을 믿어주긴 한 걸까? 날 꾀병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나는 여전히 나와의 싸움 중인데 내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내 편이 되어주길 바랬던 사람마저 날 믿지 않았다는 배신감. 무엇보다도 아파 보여야 거식증이구나. 아파 보여야 마른 거구나. 이 충격은 지금까지도 나를 무너트리는 1순위이다. 이 순간에 대응할 만한 대처방안을 나는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여전히 이런 말들에 쓰러지고 며칠씩 거식행위를 이어간다. 내가 거식증이라는 걸 아는 모두와 연락을 끊고 싶을 만큼 힘들다. 이 부분은 5번 항목과 연결해서 더 이야기하려 한다.


-4. 폭식과 구토의 욕구.

 당연하다는 게 우스운 이야기지만 강렬한 거식 행동 뒤에는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폭식의 욕구가 차오른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화 불능으로 구토의 수순을 밟는다. 이 현실이 지옥 같고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다. 내가 나를 조절한다고 생각했던 거식행위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이럴 때면 나는 금연과 금주의 방법을 떠올린다. 작심삼일이라도 그 작심들이 모여 조금이나마 내게 도움이 되고 그렇게 조금씩 성공의 경험을 늘려가야 한다는 것. 오늘 내가 소화시킬 수 없는 음식이나 양을 먹었다고 해도 나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되새긴다.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평소에 비싸게 생각했던 혹은 정말 몸에 좋은 음식들을 냉장고에 채워두고 하루에 걸쳐 조금씩 계속해서 먹는다. 그러면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날 잘 조절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느낀다. 이것이 진정한 조절 능력이다. 냉장고를 열면 무수한 포스트잇이 있다. 음식마다 모두 나름의 문구를 적어두었다. 

맛있는 거! 이거 진짜 비쌌다~ 아껴먹자. 내게 도움되는 영양소만 가득해! 이거 먹음 여행 갈 수 있어. 내 건강을 빌어주는 사람의 마음이 깃든 음식이야. 

더불어 폭식하고 싶거나 구토 후 빈 속에 뭔가를 더 먹고 싶을 때마다 혼잣말을 내뱉고 내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게 정말 네가 원하는 거야? 토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지? 조금씩 천천히 다 먹으면 돼.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이 뭐야? 정말 저걸 먹고 싶어? 정말 그걸 원해? 지금 허기지고 먹고 싶다는 건 착각이야. 이거 먹음 건강해진다고? 아니 그건 합리화야. 건강해지고 싶어? 건강해지고 싶다고 어서 외쳐봐. 네가 진짜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야. 넌 건강해져야 해. 건강해져도 돼. 건강해져서 사람들과 더 맛있는 음식을 함. 께. 먹는 거야. 넌 할 수 있어!


-5.  거식증이라는 타이틀. 

 3번과 연결되는 이야기다. 거식증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내게 그토록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살이 찌고 건강해진 내 모습을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걸 반증한다. 

 부분 관해를 겪고 있을 때, 지인들에게 <마음이 놓인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더 이상 날 만나 주지 않을 것 같고 더 이상 나에게 관심 주지 않을 것 같다. 다시 돛단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기분. 거식증이라는 타이틀을 깨고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는 불안감. 두려움. 자신 없음.

 그나마 이런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건강해지고 생기발랄 해져야 그 힘으로 큰 배에도 오르고 호화 유람선에도 오르고 그곳에서 파티까지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라고 되뇌는 일이다. 

내가 마르지 않아서 혼자 인 것이 아니라
내가 병을 앓고 있어서 외롭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적는다. 날 행복하게 해주는 일들을 적어 내려간다. 매일 날 즐겁게 해주는 일들을 찾아서 한다. 거식행위에 집착하지 않도록. 나의 관심을 분산하려 노력한다. 날 행복하게 하는 일을 하면 그 날은 행복한 날이다. 다음 날도 날 기쁘게 하는 일을 찾아 한다. 그러면 매일이 행복한 거니까. 매일 행복한 내가 되기 위한 작전을 짠다. 거식을 위한 작전이 아닌 진짜 내 행복을 위한 계획.

 날 위한 취미 생활에 몰두하다 보면 성취감을 느낀다. 그렇게 나는 유능한 사람이야.라고 환기시킨다. 거식증이라는 타이틀 따위 필요치 않은 진짜 나. 가 되기 위한 용기 있는 준비를 해 나간다. 




 그 외에 내게 도움이 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뼈 밖에 없던 시절의 사진들 절대 보지 않기. 살을 찌운다는 표현보다 증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내 취향이면서 큰 사이즈의 옷을 구매하기. 식전 기도를 하기. 한 번의 식사도 예쁘게 차려먹기. 내 의견을 남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하는 연습을 하기. 병이 서서히 나를 좀 먹었듯이 치료도 서서히 진행되는 것을 인지하기. 조급함을 버리고 나의 강함을 믿어주기. 사람들과의 식사자리를 늘려가기. 섭식장애를 수년 앓아 온 내가 한순간에 좋아지는 것은 마법 같은 일이라는 걸 인지하기.


 사실 주위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든 문제는 그들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좋은 말이라도 올곧게 듣지 못하는 나의 왜곡된 마음이다. 나의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내 탓이다. 


 연예인 몸매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을 듣고 빼빼 마른 몸이 된다 한들 누군가는 내게 여성적인 매력이 없는 초등학생의 몸이라고 할 것이고 살이 붙으면 또 누군가는 내게 뱃살이 나왔다고 할 것이다. 어떤 모습의 내가 되었든 누군가의 평가는 뒤따른다. 언제까지 그 말 하나하나에 휘둘려야 되겠는가. 나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 부분 관해를 이겨내고 완전관해를 넘어 완치의 길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일이다. 어떤 모습이든 나! 만. 큼. 은! 나를 사랑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증량하고 근육을 고루 갖춘 건강한 내가 옳고, 맞고, 원한다. 


 건강을 원하는 마음과 마른 몸을 유지하고 싶은 양가적인 마음을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 그 마저도 인정하며 하루하루를 이겨낸다. 그러나 

정상식을 하면서 마를 수 있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 또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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