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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리 Mar 05. 2020

제3부 5화 위험할 수 있는 결정들

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이번화에서는 깊이 고려해봐야 할 두 가지 <독립과 고백>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섭식장애를 앓으면서 이 두 가지를 고민하는 분들을 여럿 접할 수 있었다. 고민한다는 것은 강제되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 상황을 말한다. 그런 상황에 한에서 이 두 가지에 대한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 독립.

 섭식장애를 떠나 정신질환을 앓게 되는 요소들을 하나씩 파헤치다 보면 그 중심에 가족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물론 현대 사회의 부담감,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스트레스, 개인적 취약성 등의 이유도 크지만 유전적 요인이나 가족 소통의 부재, 가정불화 등의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섭식장애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이 질병의 발발 원인이 비단 외모에 대한 자격지심이나 미디어의 현혹뿐이 아니다. 부모와의 마찰에서 자신을 해하는 행동으로 수동적인 공격을 가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가족의 보살핌과 관심을 위해 섭식에 문제를 보이기도 한다. 가정폭력이라는 큰 문제 위에 여러 상황들이 접목되면서 섭식에 집착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분들은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지옥 같고 괴로워서 독립을 갈망한다. 가족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섭식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고도 말한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때는 독립이 답이 될 수 있다. 처음부터 완전한 독립이 어렵더라도 우선 가족과 분리되어 보는 것도 새로운 방법이다. 다시 본가로 돌아가더라도 서로 떨어져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나는 독립이 섭식장애에게 매우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일이라고 확고히 말한다. 지난 화에서 언급한 JJ가 내게 과한 제재를 보여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제한선(LIMIT LINE)을 정해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그 방법과 정도에 문제는 있었지만 JJ의 간섭들이 나는 고맙고 좋았다.

 관계를 새로 맺는 것은 쉽다. 어려운 것은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서로 알아가면서 불편한 것들을 맞추고 조절하며 만들어가는 일. 그것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지 알기에 나이가 들 수록 새로운 인연과는 어느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게 된다. 어릴 때 친구가 평생 간다는 말은 아마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가족 역시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보다 진한 피이기 때문이라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제재해 주는 것 역시 가족이다.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나의 마지막 마지노선이 되어줄 수 있는 게 가족이다. 상담 장면에서도 내담자의 가족 동거여부, 가족 구성원 중에 내담자의 지지자가 있는지를 중요한 자원(치료에 힘을 실어 줄 강점이자 자원)으로 평가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족이 지지자가 되어주긴 커녕 가족 불화가 내 고통의 근원지이자 자신에게 지옥을 선사해주고 있다면 그 관계에 쉼표를 찍어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천륜이라고 한들 끊어야 하는 인연도 있다. 내가 그러하니까 말이다.

 중요한 건,

단지 내가 제재받는 것이 숨 막히기 때문인지/ 정말 가족이 내게 지옥인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섭식장애가 깊어질수록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싫을 것이다. 가족들 눈을 피하기가 여간 어렵겠는가. 집이 빈 시간을 기다릴 것이고, 구토한 냄새를 체크할 것이고, 먹고 남은 과자 봉지를 숨길 것이다. 섭식장애인 것을 가족들이 알고 난 뒤로는 먹어라, 먹지 않겠다의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화장실로 달려갈 수 없어 집 밖 하수구를 찾아다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전쟁과 다툼들은 나를 갉아먹는 진짜 이유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를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방패가 될 수 있다. 나를 갉아먹는 건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하는 내 생각과 행동이다. 그들이 나를 제재하는 행동을 멈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잘못된 행동을 멈춰야 한다. 그러면 전쟁 또한 멈출 것이다. (가족이 섭식장애의 치료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환자의 상태와 원트에 맞춰 개입 방법을 서로 조율해야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를 분명히 한 뒤에 독립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자유를 느끼겠지만 리미티드 없는 삶은 순식간에 나를 바닥으로 내리꽂을 수 있다. 눈치 보지 않는 폭식. 24시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화장실. 자유로운 약물의 남용. 혼자 산다는 것에는 이런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좌절의 바닥에서 마주한 현실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곳에서 일어서야 하는 것도 나 혼자 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불어 독립이, 내 정신질환의 원인으로 탓할 수 있는 변명 중의 하나를 잃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힘들게 독립을 이뤘는데 아직도 섭식장애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는데 탓할 수 있는 변명거리 하나를  잃는다는 것은 내가 기댈 벽이 하나 사라지는 것과 같다. 때때로 그런 변명들이 나를 구원해주기도 하고 쓰러진 내 손을 잡아 일으켜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스스로가 독립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괴롭고 힘들더라도 가능한 그 속에서 힘들어하길, 가족 속에서 함께 싸워나갈 것을 권유하고 싶다. 함께 만들어 가는 관계는 그게 누구와의 관계이든 원래 쉽지 않은 것이다. 웬만하면 가족과 그 관계를 잘 조정할 수 있길, 가족이라는 방어벽 속에서 함께 병에 대해 배우며 힘을 합쳐 섭식장애에 맞서길 추천하고 싶다.



 - 고백.

 브런치에 글을 업로드할 때에는 어느 정도 내 안에서 추상적인 사고들이 정립되고 문장이 되어 말로 나올 정도로 정리된 주제에 한해서만 다뤄왔다. 그러다 보니 업로드가 너무 늦어져서 제3부를 시작하면서는 현재의 내 생각들을 좀 더 자유롭고 가볍게 말해보기로 다짐했다. 하여 고백에 대한 부분은 현재 나의 경험에 한해서 장단점만을 언급하려 한다.


 내가 지인들에게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알린 시점은 직장 퇴사와 맞물려 있다. 당시 하고 있는 모든 걸 멈추고 싶었는데 스스로는 그럴 용기가 없어서 몸이 쓰러져주길 바랬다. 나는 퇴사에 대한 합당한 변명거리로 섭식장애를 꼽았다. 물론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정도의 몸 상태이기도 했다. 장점은 단지 이것뿐이다. 조증의 내가 벌려놓았던 일들과 사회적 과제들, 현실의 부담감에서 도망갈 구멍을 만든 것. 이 병을 숨기기 위해 그토록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는데 말이다.

 "나 아픈 사람이야, 이런 결정을 한 마음을 이해해줘, 조금 쉬어도 되지 않을까?" 나는 다수의 누군가들에게  <허락>을 받고 싶었다. 나는 나의 휴식조차도 그렇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썼다. 내 몸을 망가트리는 대가를 치르면서 말이다.


 단점은 장점에 비해 많았다. 내가 자처한 일이었지만 나를 환자로 인식한 지인들은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일들도 유난스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이 "나는 추위를 많이 타."라고 한다면 그냥 그 문장 자체로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테지만 내가 추위를 많이 탄다고 하면, '정말 거식증 환자는 추위를 많이 타는구나', '안 먹으니까 추운 게지...'라고 생각한다. 지인들은 나라는 사람 그 자체로 봐주지 않고 '섭식장애를 앓는 나'로 봐주었다. 섭식 장애자라는 선입견이 생겨버린 거다.


 두 번째 단점은 타인에 의한 아웃팅이다. 내가 밝힐 마음이 없거나 원하지 않았던 지인은 물론이고 새로 만나게 되는 관계마저 나의 정신질환 이력을 알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의 절망감과 당혹감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세 번째 단점은 정신병자로 낙인이 찍히면 사람들은 정신병자의 말은 웬만해선 쉽게 믿어주지 않는다. 어쩌면 '아무도'라는 단어를 붙여도 나쁘지 않을 만큼... 내가 무엇을 해도 '정신병자' 이 한 단어로 게임은 끝이 난다.


 섭식장애를 알리는 일은 내게 득 보다 실이 더 컸다.


 본인에게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주고 치료에 도움이 되어줄 지인이나 가족에게 알리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지만 충동적으로, 관심이 필요해서, 섭식장애라는 질환을 변명 삼기 위한 이유로 고백하는 것은 재차 고민해봐야 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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