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유리 Feb 23. 2020

제3부 4화 Empathy와 Sympathy의 차이

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사전적으로 Empathy는 공감. Sympathy는 동정, 연민의 뜻을 갖고 있다. 국어사전에서 공감(共感)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으로 정의한다. 동정(動靜)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김. 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베풂으로 정의한다.


 쉽게 말해 공감은 상대의 감정에 본인 또한 감정이입이 되어 같은 감정을 느끼고 공유하는 것이라면 동정은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딱히(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더 옳고 좋다기보다 공감과 동정은 엄연히 다르다. 처음 내가 이 두 단어를 접한 건 대학 때였다. 상담 장면에서 상담사는 내담자를 공감해야 하지만 동정해선 안된다는 '교육'을 받았었다. 그때는 내가 상담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있었지만 지금은 철저히 내가 환자이다. 이 두 단어의 미묘한 차이가 대체 무어냐며 헷갈리기 쉬운데 내담자의 입장에서 이 두 단어의 차이는 극명하다. 


 지인에게 지나온 내 삶의 일부분을 들려주면 대다수가 

알지, 알아. 어머 너무 힘들었겠다. 아, 그 배고픔 알지 알아.
 그때 정말 추웠겠다. 너무 대단하다. 너는 성공할 거야. 

라는 말로 시작해서.


네 말을 듣다 보니 내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싶다. 

로 끝나곤 했다. 


 나를 공감하던 눈빛에서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안도의 눈빛으로 변하는 장면을 나는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그저 살아온 이야기를 덤덤히 말하는 것에도 공감과 동정의 차이를 느껴왔는데 섭식장애라는 것을 밝히고 나서 내가 받았던 시선은 어떠했을까. 진심으로 나를 응원해주었지만 길어지는 투병 생활에 지쳐 떠나간 사람들, 내게 제2차 3차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 먼발치에서 묵묵히 응원해주는 사람들, 아직까지도 곁에서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 내가 믿는 희망마저도 무시하는 사람들, 식사를 강요하는 사람, 함께 살을 찌워주겠다던 사람, 섭식장애를 부러워하는 사람에서 질환 자체를 비하하는 사람까지 몇 년 사이에 정말 많은 사람들을 겪어왔다. 


 지금까지 내 곁에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한 없이 미안함과 감사함을 갖고 있다. 간혹 그런 소중한 사람들 중 일부는 내게 그들이 필요한 것처럼 그들에게도 거식증이 있는 친구가 필요한 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그 미묘한 차이가 공감과 동정의 차이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섭식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을 밝힌 후 급속도로 친해진 지인 JJ가 있다. JJ는 겨울에도 여름 치마를 입고 있던 내게 겨울 옷과 여름 옷의 차이나 화장품 등에 대해서 친절히 알려주었다. 앙상한 내 두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JJ는 내가 밥을 먹으면 그 보다 더 기쁜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JJ는 비건 주의였는데 소화의 문제로 고기를 섭취하지 못하는(그 외의 이유도 다수지만) 나를 예쁜 비건 식당들에 데리고 다녔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자신을 친자매로 생각하라던 그녀가 그토록 감사했다. 

 JJ는 폭식증이 있어서 남편이 잠들면 다른 방에서 탄산과 함께 어마어마한 양을 먹고 토하곤 했다. (현재도 폭식을 하는지는 모른다.) 나 역시 적은 양을 먹고도 혹은 술과 함께 폭식 후 토를 하곤 했기 때문에 그런 행위와 죄책감에 대해 깊이 말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었다. 

 언제가부터 JJ는 더 이상 자신의 폭식 이야기나 사생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예전보다 더 강건한 자세로 내게 건강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치부는 전혀 밝히거나 공유하지 않은 채 오로지 나의 건강을 걱정했다. 자연스러운 변화에 나 역시 그 흐름에 몸을 맡겨 버렸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JJ는 거대한 마더 테레사의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길 잃은 아이를 돌보 듯 나를 대했다. 함께 식사를 하면 내가 몇 번의 젓가락 질을 하는지 매의 눈으로 살폈다. 화장실에 가면 시간을 재며 감시했고 헤어진 후에도 내가 어딘가에서 토하지 않을까 내 뒤를 밟았다. 식사 중엔 너무 오래 씹는다며 그만 삼키라 말했고 물을 마시면 토하려고 마시냐며 한 소리를 꼭 덧 붙였다. JJ는 자신이 못 입거나 안 입는 옷, 실수로 산 화장품 등을 선물로 주곤 했다. 그러면서 늘 이렇게 말했다. 

기분 나쁜 건 아니지? 

내가 너무 뭐라고 해서 기분 나쁜 건 아니지? 내가 한번 썼던 거지만 정말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예뻐서 샀는데 정말 몇 번 못 입었어. 

다, 널 걱정해서 하는 소리야.


 JJ는 십 대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결혼 전 남편의 경제 상황이 몹시 힘들었단다. 자신이 속옷부터 겉옷, 이발은 물론이고 먹고 쓰는 것 까지 사주며 챙겨주었다고 한다. 결혼 후 남편은 안정적이고 존경받는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JJ는 그 후 아프리카 TV에서 신입 BJ에게 위로를 받았다며 상상초월의 별풍선은 물론이고 BJ의 컴퓨터와 조명, 데이트 비용까지 지불하였다. 신입이었던 BJ는 승승장구했고 BJ가 잘 나갈수록 JJ는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그때쯤 JJ가 만난 사람이 나였다. 

 심지어 JJ의 초대로 그녀의 집에 가서 만난 반려동물마저 장애를 갖고 있었다.


  현재 JJ와 나는 연락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만큼의 만족을 주기엔 나의 치료가 더뎠을 것이다. 친자매로 생각해 달라던 그녀는 작년 여름, 장기 입원 중이던 내가 어렵게 연락을 취했지만 면회조차 오지 않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서운했을 것 같다며, 장기를 빼줄 것처럼 굴던 그녀의 사과를 들었던 것이 JJ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녀의 친절이 진심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나를 소중히 생각하고 아껴주고 싶었지만 나의 더딘 걸음에 지쳐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느꼈던 그녀의 우월의식과 선행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 역시 사실이다. JJ는 내 개인 상담사가 아니다. 그녀는 일반인이고 나의 친구였다. JJ가 상담사처럼 나에게 공감하되 동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 역시 그녀의 권리고 자유다. 나 역시 동등한 사람으로 평범한 친구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니까.

 그러나 나의 아픔과 괴로움이 누군가의 자존감의 재물로 받쳐지고 싶진 않다. 




패싱 케어라는 개념이 있다. 지나치게 지적하거나 간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며 환자를 편안히 해주는 도움. 나는 그렇게 패싱 케어를 이해하고 있다. 모두에게 이렇게 해달라고. 내가 아프니까 이렇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제발 믿고 기다려 주면 좋겠다. 그들의 걱정에 어렵게 부여잡은 내 희망마저 빼앗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환자는 주변에서 이런저런 걸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가장 병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을 수 있으며, 그렇게 주변에서 도와준다는 것이 오히려 괴로움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괴롭히지 않아도. 충분히. 충분히. 고통받고 있다.


이전 22화 제3부 3화 안다는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