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코틀랜드 독립사

스털링을 가지는 자가 스코틀랜드를 지배한다

by 넙죽

스털링에 스코틀랜드의 운명이 달려있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에서 한 시간 정도 철도를 따라 가면 스털링이라는 도시가 나온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도시지만 이 곳 스털링은 스코틀랜드의 역사에서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스코틀랜드는 크게 하이랜드와 로우랜드로 구분한다. 하이랜드는 스코틀랜드 북쪽에 위치한 고산지대를 말하는데 스코틀랜드 인들의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지역이다. 용맹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부를 때 하이랜더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로우랜드는 잉글랜드와 가까운 남쪽 지역으로 하이랜드에 비해 비교적 평탄한 지역을 말한다. 로우랜드가 비교적 평탄하다고는 하나 평지가 많은 잉글랜드에 비해서는 고도가 꽤 높은 지역이다. 에딘버러 등의 대도시도 이곳 로우랜드에 위치해 있다.


내가 이번에 방문한 스털링은 하이랜드와 로우랜드 사이에 위치한 도시인데 도시 자체가 하이랜드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스털링을 지배해야 스코틀랜드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며 그 때문에 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스털링 성은 꽤나 견고해 보인다


브리튼을 통일하려는 야심 찬 왕, 에드워드 1세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1세는 매우 야심 찬 왕이었다. 잉글랜드의 내정을 착실하게 다져나간 능력 있는 왕이기도 했지만 이와 동시에 브리튼 섬 모두를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하는 야심가이기도 했다. 노르망디에서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정복한 정복왕 윌리엄의 후손다운 남자였다. 그는 순식간에 웨일스를 정복해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스코틀랜드까지 넘보고 있었다. 이 야심만만한 왕에게 있어서 스코틀랜드는 그저 굴복시켜야 할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더들이 꽤나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코틀랜드의 전통 의상인 퀼트를 입은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더들은 용맹하기로 유명하다

칠전팔기의 영웅, 로버트 브루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는 뜻의 칠전팔기, 어떤 일에 도전할 때의 끈기를 강조하는 말이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 정도의 끈기를 발휘하기란 쉬운 일 아니다. 한두 번의 실수로도 좌절하기 쉬운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도전하며 자신을 불사르는 것은 어지간한 소명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 스코틀랜드에 그런 인물이 한 명 있다. 스코틀랜드 독립의 영웅인 로버트 브루스이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로 알려진 윌리엄 월레스 보다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사에서 로버트 브루스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다. 칠전팔기 끝에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얻어낸 사내이기 때문이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군사력을 잉글랜드에 비해서 매우 약했기 때문에 매번 패전하기 일수였다.


패전을 거듭하면서 로버트 브루스는 굉장히 낙담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눈에 거미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거미는 여느 거미들과 마찬가지로 거미줄을 이용해 자신의 집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솜씨가 서툴렀는지 몇 번을 시도해도 거미집이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로버트 부르스는 그 거미의 모습이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더란다. 그런데 수차례 시도하던 거미가 마침내 자신의 집을 만들어내자 그는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작은 미물인 거미 조차도 끈질기게 도전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내는데 사람인 자신이 이에 뒤질 순 없지 않은가!


이때 깨달음을 얻은 그는 계속해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이 곳 스털링 근교의 베넉벤에서 잉글랜드 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하면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얻어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로 즉위하게 된다. 이른바 인간승리이다.

원래 사람이 하는 일에 매번 성공이 따르기는 쉽지 않다. 20대 초반 시절 만나게 된 한 어르신이 해주신 말씀이 있다. 인생을 살면서 목표를 향해 도전할 때 열 번 중 여덟 번 정도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끔 성공하는 한두 번이 성공이 너의 인생을 만든다고. 업무에서든, 인간관계에 있어서든 실패를 하고 좌절할 때마다 되새기는 말이다. 인생은 길고 일의 성패를 떠나 무엇인가에 계속 도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렇게 도전하는 과정으로도 나의 인생은 채워지니까.


로버트 브루스의 동상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윌리엄 월레스


살아생전 자신의 목표를 이루어 내어 존경을 받는 사람도 있는 반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더라도 불꽃같은 삶을 살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강한 여운을 남기는 사람도 있다.


스코틀랜드의 윌리엄 월레스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잉글랜드의 입장에서 윌리엄 월레스는 골칫거리였다.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손쉽게 점령할 것이라 생각했던 스코틀랜드가 윌리엄 월레스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저항해왔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저항군의 지도자 윌리엄 월레스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였다. 당시 잉글랜드의 주력은 당시 중세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갑주로 무장한 중기병과 장궁병이었다. 특히 보병이 중심이었던 스코틀랜드에게는 다른 어떤 병과들보다 중기병이 위협적인 존재였다.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아 돌진하는 중기병의 파괴력은 현대의 전차 못지않은 파괴력을 가졌었다. 때문에 당시에는 보병들이 평원에서 중기병을 만나면 십 중 팔구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윌리엄 월레스는 병사의 수나 장비에서 스코틀랜드 군이 잉글랜드 군에 비해 열세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털링으로 진군한 잉글랜드 군을 상대하기 위해 한 가지 꾀를 냈다. 스털링에 흐르는 강 위에 놓인 다리에서 전투를 치르는 것이었다! 좁은 다리 위에서라면 아무리 적의 숫자가 많아도 한 번에 많은 병사들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하기 훨씬 수월할 터이고 중기병들도 말을 달려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힘을 못쓰게 되기 때문이다. 윌리엄 월레스의 예측은 적중했고 스코틀랜드 군은 잉글랜드 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스털링을 흐르는 강 위에 놓여진 다리
아마도 이런 다리들 위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스털링 다리 전투가 중요했던 것은 비록 병사의 수가 부족하고 장비가 열악하더라도 전략만 잘 쓰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경험을 스코틀랜드 인들에게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윌리엄 월레스는 살아생전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보지 못하게 된다. 말년에 몇 번의 패전을 거듭하던 그는 잉글랜드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기다가 결국 붙잡혀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독립이라는 꿈을 자신의 생전에 이루지 못했으나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잉글랜드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죽어서 스코틀랜드 독립의 상징이 되었고 그로써 영원히 역사 속에서 자유의 상징으로 살게 되었다.


윌리엄 월레스, 그는 죽어서 스코틀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역사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로버트 브루스와 윌리엄 월레스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서 치열하게 싸운 시대가 몇백 년쯤 흐른 뒤 아주 잉글랜드의 왕실에서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다. 잉글랜드의 전성기를 이룩한 여왕이었던 튜더 왕가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식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때문에 잉글랜드의 튜더 왕가는 대가 끊기게 되고 여왕의 뒤를 이어 누가 왕위에 오를지가 희대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때 마침 그나마 여왕과 혈통적으로 가까운 친척이 하나 있었다는 것을 잉글랜드에서 깨닫고는 그 사람을 잉글랜드의 왕위에 앉히게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당시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스튜어트였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손에 넣으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썼음에도 손에 얻지 못했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스코틀랜드 계의 왕에게 잉글랜드를 통째로 넘긴 셈이 되었다. 로버트 브루스와 윌리엄 월레스 입장에서도 황당한 일이 아니었을까. 잉글랜드를 상대로 그렇게 자주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웠건만 두나라는 왕족들의 혈통 문제로 인하여 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역사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아이러니의 연속인 것 같다.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유니콘과 잉글랜드 왕의 문장인 사자가 같은 문장 안에 있다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찾아 떠난 고난의 길


스코틀랜드에서 스털링은 참 중요한 도시였지만 현재의 스털링은 작은 소도시다. 얼마나 작은 소도시인가 하면 버스가 하루에 몇 대 다니지 않는다. 버스의 배차 간격도 한 시간이 넘고 막차도 오후 여섯 시가 넘으면 끊겨버린다. 더 중요한 것은 버스 정류장을 찾기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스털링 역에서 나와 스털링 성을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즐거운 여행길이었다. 높다란 언덕길이 장애물이긴 했지만 그래도 역에서 20분 정도만 걸어올라 가면 스털링 성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털링 성을 열심히 구경하고 나와 이제 윌리엄 월레스의 기념탐을 향해 가려고 스마트폰을 검색했는데 걸어서 한 시간이나 걸린단다. 당연히 처음에는 걸어서 갈 생각 따위는 없었다. 여행자에게 체력의 적절한 안배와 시간의 단축은 필수적이니 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택시를 찾고 버스정류장을 찾아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던 나는 무작정 걸어가기로 했다. 한참을 걸어 버스 정류장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참이기도 했고 정류장에 적힌 배차 간격이 너무 길어 계속 걷는 것이 낫다 고 판단해 계속 걸었다. 한참을 걸었더니 무릎이 아파오고 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더라.


이어서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니 비로소 윌리엄 월레스의 기념탑이 눈에 보였다. 그런데 입구가 닫혀있다. 주변에 다른 관광객들에게 물어보니 아마 지금쯤 문을 닫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서 직원에게 문의하니 이곳까지 오느라 지친 내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는지 탑 안에는 들어갈 수 없으나 밖에서 탑의 모습을 보는 것은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자기는 퇴근하지 않을 테니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보다 오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보고와서였을까. 여행을 다녀왔을 때 누가 이번 여행해서 너는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니라고 물었을 때 주저 없이 스털링이었다고 말하게 되었다. 역시 여행은 고생한 만큼 기억에 남나 보다. 물론 사서 고생하는 것은 그다지 추천하지는 않는다.


저기 저 탑이 야속하리 만큼 멀게 느껴졌다


keyword
이전 17화차 한잔의 여유, 애프터눈 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