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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양 Sep 10. 2019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하여.



"지금 미리 공부해 두면, 나중에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아버지는 수능을 끝난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렇기에 대학 가서 공부하고 하고 싶은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말은 그대로 믿어야 할 말이 아니라는 것은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아버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틀린 말이었다.


 우리는 분명 그렇게 자랐다.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축구선수요!"

"대통령이요!"

"가수요!"

 라고 말하면서 하나같이 전부 '꿈'을 '직업'으로 대변했었다.

 그중에는 친구들끼리 농담으로,

"'아빠' 또는 '엄마'가 꿈 아니야?"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부모님이 있는 어린 시절의 우리에게는 모두가 당연하게 엄마나 아빠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꿈도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십 수년이 지나야 확실히 깨닫기도 했다.



 나의 친척들 중에는 대학교를 중퇴한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서 총 4명이나 있다.

 그 모습에 어른들은 그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아니. 요새 애들이 왜 이래? 한 명 중퇴하니 따라서 중퇴하고 있네."라며 못마땅해하는 듯했다.

 부모님의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뼈 빠지게 일을 하고 돈을 모아서 대학 다니라고 등록금을 넣었더니 돌아오는 건 중퇴뿐이니 말이다.

 

 나는 모든 3학년까지 등록금을 전액 장학금을 받아가며 스스로는 아쉬움이 없었지만, 부모님의 입장에선 그만한 성적을 거두고도 중퇴를 한 나를 이해해 주신 것은 아니었다. 대학 교수님 또한 만류하려는 느낌이셨지만 나는 대학에 다녔던 모든 시간과 성적들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훗날, 나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장래희망에서 '글을 쓰는 요리사'를 하고 있다.






  나는 원래 간호학과를 지망했었다. 하지만 그러면 지방에서 수도권 지역으로 하숙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렸고, 당시의 집안 사정 또한 좋지 못해 장학금 보증을 한 다른 대학교를 선택하게 되었다.


 1년이 지나서 그 대학교를 선택한 것은 후회로 이어졌다.

 집에 부담 없이 등록금도 0원 처리되어 다닐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편도 2시간이 걸리는 이동거리는 생각보다 끔찍했었다. 왕복을 따지만 이동시간만 4시간이며 그 시간은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을 가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박감이 들기 시작한 게 하나 있었는데, 그동안 장학금을 받아왔으니까 이번에도 꼭 받아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이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결과 나는 그저 공부를 할 뿐이고 전공수업과 그 조건에 맞게 여러 교양과목을 듣고 좋은 학점을 채워갔다. 그리고 어느 날 성적표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연 이렇게 성적을 받아놓고 군대를 다녀오면,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그건 상상 이상의 공포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생활을 생각하면 더 심했다.

 그 시절에는 학교를 8시까지 등교를 해서 저녁 10시에 마쳐서 학원까지 다녀 새벽 1시에 돌아왔었다. 그리고 그땐 토요일에도 학교를 가야 했고 방학에도 등교를 했다. 아예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은 2주 정도 되지 않았다. 


 그저 대학을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공부를 해왔었다. 그리고 시간과 선택의 여유가 생겼을 뿐, 지금과 그때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은 취업을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 무엇을 하고 싶어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지금 미리 공부해 두면, 나중에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를 이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와서 그게 별반 다를게 없어진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지고 즐겁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평생을 그 직업으로 돈벌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 걱정들이 우울증에 빠져들게 만드려고 하고 있었다.

 이미 사서 걱정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부분은 생각해둬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군대를 가는 것도 두려워져서 입대를 계속 미루게 되었었다.



 한편으로는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여유를 가지게 된다면 하고 싶은 것도 찾게 될 것이고 선택하면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여유를 얻기 위해서 공부하라는 선생님과 부모님은 결국, 그런 것을 찾지 못해서 어렵다고 한다면, 돌아오는 건 내가 알아서 찾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알려줄 뿐, 정작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진 않는다. 

 

 그저 선택하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지에 내가 원하는 게 없다면, 돌아오는 말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는 말이었다.



 나는 음악을 좋아했고, 책을 읽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게 직업으로 이어질 수는 없었다. 직업으로 이어나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이 갔었고, 어떻게 시작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런 채로 군을 입대하게 되었고, 늦게 입대한 만큼 여유 부릴 시간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일단 이거라도 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부동산 공부를 하기 시작했었다. 

 좋아하는 것은 그저 좋아하는 것일 뿐이고, 그게 일이 되는 것은 또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대체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나 고민을 했다.

 대학교는 계속 휴학처리를 하고 있었고 더 이상 휴학계를 낼 수도 없었다.

 

 나는 대체 어떤 특기를 가졌고 어떤 기술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했던 와중에 떠오르는 건 요리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위해서 배워왔던 요리.

 그때는 요리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더라도, 맛있는 것을 만들어서 먹는 가족들이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물론 내가 만드는 음식을 먹어주는 사람이 그 맛에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시 그런 기분이 들고 싶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었지만, 그렇게 내가 만든 요리를 먹고 맛있다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건 나에게 있어서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결국에 나는 요리라는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든 램지라는 세계적인 셰프를 정말 좋아하게 되었고, 계속하여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고 또다시 배워나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인 셰프인 고든 램지도 그런 말을 하기 때문이다.

"요리는 끝도 없이 배울 수 있다. 새로운 요리들이 매일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늘 새롭고 즐겁다." 

 그 말은 그만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요리를 만들 것들이 무궁무진하다는 말이 되었다. 

 나는 평생직업으로 요리사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요리는 계속 배우고 싶고 하고 싶었다.

 먹는 것은 사람에게서 때어낼 수 없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기쁨을 계속 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나는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나에게 그 '어떤 사람'이란, 타인에게 맛있는 음식을 선보여 좋은 추억을 남길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아내서야 확실하게 대학교를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계속해서 버텨내야 한다.

 살아남아서 계속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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