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링보다 심오한 자신을 들여다보길
몇 달 전 읽은 로랑스 드 빌레르의 <모든 삶은 흐른다> 중에
"우리는 라벨과 분류에 저항해야 한다. 어떤 인간도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고 성향도 똑같지 않다. 우리 인간은 상품처럼 하나의 특징만 갖고 있지 않고 살아있는 영혼으로서 항상 움직이고 변화하는 존재다. 그리하여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상상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다."라는 구절이 너무 공감 갔다.
2018년 미술수업을 하던 중학생들이 들뜬 모습으로 내게 MBTI 검사를 해봤냐고 물었다.
"그게 뭔데?"라고 묻는 내게 아이들은 사이트를 하나 알려줬고 "그래 집에 가서 해볼게" 하고 그날의 수업을 진행했다.
성격유형검사라는 그 질문들에 답하며 요즘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때 여학생들이 취할 수 있던 정보의 정수(?)였던 잡지의 온갖 심리 테스트들이 생각났다. 나는 그 질문들이 조금 불편했다. 계획적인 여행을 좋아하거나 발길 닿는 대로 하는 여행을 선호하거나 그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동행자에 따라, 여행지의 안전도에 따라 다르다. 내향적인지 외향적 인지도 상대방이나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나처럼 그 질문들에 적절한 답을 찾기 어려운 사람은 테스트를 하고 있는 그날의 상태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올 것이다.
동의와 비동의 사이의 7단계의 동그라미 ('매우 그렇다', '그렇다', '조금 그렇다', '보통', '조금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매우 그렇지 않다')를 선택해 점수를 합산해 내-외향성, 사회성-비사회성, 이성-감성, 계획-즉흥성의 따져 16개의 캐릭터 중 하나가 나온다. 7단계 중 가운데 동그라미인 보통과 보통의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의 MBTI는 '줏대 없는 변덕쟁이'가 되려나?
당시 나는 학교 진로상담 시간에 이 MBTI 검사를 한다는 걸 듣고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이들이 이 검사결과에 너무 빠져들고 몰두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생각은 뭐 그럴 수도 있지. 아직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나이에 자신의 세세한 부분을 짚어주는 말들이 신기했을 거다. 가려운 줄도 몰랐던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듯 이해를 받는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걸 학교에서 한다는 것이다. 대단히 신빙성 있는 성격검사인 듯 미래의 직업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신빙성이 없는 검사라고 비방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사춘기 아이들은 물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취향을, 본인이 정말 살고 싶은 삶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아이들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어떤 변화든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이런 검사로 자기의 인생을 16가지 틀 중 하나도 결정하도록 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16가지 틀이라고는 해도 그게 16가지 인생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구분하고 그에 맞는 적성을 찾아주고 진로에 도움을 주겠다는 취지일 거다. 하긴 뭐 우리 땐 4가지 혈액형이 자기 성격을 결정짓는다고 다소 많은 부분을 믿고 통용했으며, 2000년대 초반에는 지문검사를 통해 아이의 성향을 파악하고 진로 적성을 찾아주는 검사가 짧게 유행한 적도 있다. 그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발전인가?
사춘기 아이들이 MBTI에 빠져드는 이유는 공감받고 싶기 때문이라를 생각이 들었다. 내 미술 수업의 아이들은 내 검사결과를 묻고 선생님은 I일 줄 알았다. J성향인 줄 알았다는 등의 말을 했다. 자기들끼리도 너는 E라서 누구는 T라서 같은 말들을 하며 수업에 자주 늦는 이유를, 혼자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듯 인정했다. 처음 그 아이들을 통해 MBTI를 알게 됐고, 5년이 지났다. 요즘은 세대구분 없이 다들 MBTI를 말한다. 사춘기 아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건 그때의 성장에 필수적인 과정이니 인정해 주자. 자기랑 맞아떨어지는 성격을 표현하는 단어를 찾으면 몰입하고 자신을 라벨링 한다. 하지만 그게 고정된 너는 아니라고 로랑스 드빌레르의 말을 빌어 얘기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