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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Oct 12. 2020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회피의 굴레 : 내 삶의 진짜 문제를 발견하다


오늘과 비슷한 하루가 내일 또 반복될 거라고 생각하면 나는 자주 아득해졌다. 지금의 내 문제가 무엇인지 꼭 알아야 했다.


놀랍게도 가끔 해결의 실마리는 아주 일상적인 곳에서 발견되곤 한다. 당시 회사에서 AI 추천을 연구하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특정 인물에게 딱 맞는 콘텐츠를 추천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과거 행적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튜브가 마치  마음을 읽는 것처럼 영상을 추천해주는 이유는 그들이 점쟁이라서가 아니라  과거 재생 이력을 철저히 분석해서 그렇다. ‘과거를 통해 미래의 마음을 예측하는 그게 추천의 핵심이었다. 어느 날 문득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하여 노트북 전원을 켜면서 다짐했다.


내 삶의 궤적을 샅샅이 톺아나가 보자고.
그러다 보면 불확실한 미래가 조금은 또렷해질 것이라고.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회피 성향



그때부터 캔버스에 내 삶의 큰 사건들을 나열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세히 오래오래 들여다봤다. 그러자 어떤 반복되는 특징 하나가 수면 위로 얼굴을 드러냈다. 그것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회피 성향’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인생의 주요 순간마다 엉뚱한 곳으로 도망을 치고 있었다. 무려 10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도피에 재능이 있었다. 진실을 마주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자주 도망을 쳤다. 예를 들면 시험이 끝난 후 다른 친구들이 채점에 열을 올릴 때 나는 교실 앞 칠판에 점수가 붙을 때까지 결과 보는 것을 미뤘다. 다이어트의 시작은 인바디라지만 나는 바지가 조금 헐렁해지기 전까지는 인바디 기계를 피했고, 인터뷰를 보러 다닐 때는 합격 통보 메일을 늘 다음날 열어봤으며, 중요한 사람과 메신저로 이야기할 때는 ‘읽음 1’을 그대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유난스러운 행동들이 조금 소심한 성격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지독한 회피 성향은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제 능력을 한껏 발휘했다. 나는 방송 PD를 꽤 오랫동안 꿈꿔왔는데, 다른 동기들이 모두 언론고시를 준비했던 대학교 4학년 때, 갑자기 호주로 교환학생을 떠나버렸다. 모두들 내 선택을 의아해했고, 더러는 미쳤다고 했다. 그렇게 1년 간의 호주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PD 시험에 세 번 정도 응시했다. 남들이 기본 20번 정도는 도전한다는 방송국 시험이었다. 하지만 또 돌연 IT회사에서 인턴을 시작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그 후엔 물 흐르듯 정규직 전환이 되어 계속 서비스 기획자와 UX 디자이너의 삶을 살았다. 그 후로도 철새처럼 여기저기로 부서 이동을 했으며, 단출하게 짐을 싸서 자주 먼 곳으로 떠났다.


© Free-Photos, 출처 Pixabay



나의 내면을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



왜 나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엉뚱한 곳으로 도망을 친 것일까. 벽에 붙여 놓은 내 삶의 연대기를 오래오래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한참 후에 깨달았다. 나는 내면을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방송국 PD처럼 남들이 볼 때 멋있어 보이는 것 말고, 내가 무엇을 진짜로 하고 싶은지, 나는 어떤 일에 재능이 있는지, 정말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고민하는 것 자체를 미룬 것이다. 그 행위가 오랫동안 어려워서 계속 무엇인가를 하면서 바쁘게만 지냈다. 나름 열심히 잘 살고 있다고 자위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나를 지켰음을 인정해야 했다. 실패했을 때 받을 상처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도전 자체를 아예 포기한 것이다.


그래, 나는 사실 잘할 수 있었는데
도전하지 않은 것뿐이야.
열심히 하지 않았을 뿐이야.


라고 못난 위로를 한 것이다.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굉장히 높았던 거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이런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영화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 중


얼마 전 읽은 심리학 서적에서 읽은 바로는 나를 지키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방어기제’가 ‘회피’라고 한다. 눈앞에 닥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그냥 외면해버리는 것은 얼마나 쉽고 간편한 일인가. 할 수만 있다면 계속 도망치면서 살고 싶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외면한 반복적인 회피는 내면의 결핍감만 키울 뿐이다.


그래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10년 넘게 도망을 쳤으면 이제는 이 굴레를 끊어낼 때도 되었다. 더 이상 ‘이게 아닌데’를 외치며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여행으로, 운동으로, 유흥으로 도망치기만 하면서 살지 않을 것이다. 살던 대로 살면서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지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여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나라는 사람을 가만가만 들여다보면서 이제라도 원하는 삶의 방향을 직접 그려 나가 보기로 했다. 그동안 도망치느라 제대로 굴러가지 않던 내 인생의 시계가 이제야 똑딱대기 시작했음을 느낀다.



*커버 출처 : http://www.hani.co.kr/arti/PRINT/90026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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