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ooje 주제 May 10. 2020

인도 물약, '짜이빛' 델리의 맛

주제 in 인도 그림 여행기 - '애증'의 델리



겨울과 여름, 두 번의 인도여행기를 쓰고 그립니다


인도 물약이 찾아준 '짜이빛' 델리의 맛

- '애증'의 도시 델리 상륙기



   카오스란 이 곳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소음에, 소음, 그리고 다시 소음이었다. 인천에서 상해, 상해에서 델리로 향한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델리 공항에 도착했다. 워낙 늦은 시간이었던 터라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바로 숙소 픽업 차량에 올랐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도 거리는 차로 가득했다. 꽉 막힌 도로였지만 차들은 빵빵 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앞의 차가 가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 분명한데도 모두가 경적을 울려댔다. 인도인들은 특별히 경적소리를 사랑하는 걸까?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시끄러운 와중에 도로 상황은 불안할대로 불안했다. 숙소에 가까워지면서 도로는 점점 좁아졌고, 그럴수록 차선은 희미해졌다. 오토바이, 릭샤, 승용차, 트럭이 한 데 뒤엉켜 저마다의 경적을 뿜어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차선 없는 이 인도 도로엔 나만 모르는 그들만의 규칙이 존재하는 듯 했다.

 

   인도 여행자들이 왜 그렇게 델리를 말할 때 고개를 젓는지 이해하는 데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시끄러운데다 먼지는 또 어찌나 많은지 잠시 차 창문을 열어놓자 핸드폰 액정에는 먼지가 수북히 앉았다. '미세'한 먼지 수준이 아니라 정말이지 '특대' 사이즈 먼지들이었다. 너무 놀라 서둘러 창문을 닫았다. 델리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만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떠올랐다. 내가 무엇을 상상했든, 그 이상이 여기에 있었으니.


   이윽고 차에서 내려 숙소까지 기사님의 안내를 받으며 걸었다.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의 주택가라, 소음은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하지만 차라리 조금 시끄러웠으면 싶을 정도로 주변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해리포터가 다이애건 앨리대신 녹턴 앨리에 불시착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좁고 으슥하며, 찜찜한 그 느낌. 온통 새까만 골목들을 차례로 지나 당장 추락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엘레베이터를 타고, 첫 숙소에 도착했다. 보풀이 일어나 조금 까실했던 침대에 누워, 든 생각은 단 한 가지.

"나... 오기 잘 한 걸까?"

   코를 흥 하고 풀자 휴지가 온통 까매졌다. 내게 다가온 인도의 첫 색깔이었다.





   아침의 델리는 다행히 조금 덜 시끄러웠다. 비록 새벽 5시부터 울리는 경적 소리에 잠에서 깨긴 했지만, 야밤의 기억이 워낙 강력했던지라 몇 번의 빵빵 소리는 귀엽게 느껴졌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내 귀는 그새 무뎌진 듯 했다. 나의 숙소가 있던 '빠하르간지'는 여행자의 거리라 불린다. 그만큼 여행자를 위한 환전소, 숙소, 식당이 모여있다. 줄임말 좋아하는 우리나라 여행자들에겐 '빠간'으로 통했다. 한인 숙소, 식당들도 밀집해있어 인도를 여행하는 모든 한국인은 이곳을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짐 정리를 마치고, 환전을 도와주신다는 한인 숙소 사장님과 함께 거리에 나섰다. 아침 공기가 살짝 쌀쌀하면서도 햇살이 비치는 게 딱 가을 날씨였다. 도시 주변부라 그런지 먼지도 어제보다 훨씬 덜 했다. 거리는 막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활력이 돌았다. 음, 나쁘지 않아.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지만 여전히 긴장을 풀긴 어려웠다. 범상치 않은 나라를 골라서 그렇지, 이래 봬도 혼자 하는 첫 해외여행(심지어 일본, 대만 밖에 안 가봤음)이었다. 어딜 봐도 낯선 얼굴들로 가득한 거리를 걷는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란 걸,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호기심과 경계심이 어우러진 표정으로 두리번대며 사장님의 뒤만 쫓아 걸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사장님께서는 동네에서 가장 붐비는 짜이집이 있다며 잠깐 들르자고 하셨다. 인도인들이 하루에도 몇 잔씩 마신다는 그 짜이였다. 그 맛이 얼마나 궁금했는지!


   거리 곳곳엔 이미 짜이를 파는 노점상들이 많았다. 하지만 사장님은 꼭 그 가게의 짜이를 마셔야 한다며 걸음을 서두르셨다. 마침내 도착한 노점은 이미 인도 현지인들로 둘러 쌓여있었다. 한가한 다른 가게와는 달리 끊임없이 짜이를 냄비 째 끓여내는 모습이 몹시 분주해보였다. 사장님께선 능숙하게 '투 짜이'를 주문하셨고, 주인 분은 고개를 '까딱'이셨다. 짜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국 그릇같이 큰 통에 짜이를 끓여놓고 담아주는 게 아닌, 그때그때 계속 만들어내는 시스템이었다. 정체불명의 가루들을 차례로 넣고, 액체를 체에 거르고, 이를 열심히 저어주는 과정이 반복됐다. 몇 잔의 짜이를 눈 앞에서 떠나보냈을까, 주인 분께서 드디어 우리 몫의 짜이를 건네주었다. 일회용잔이 아닌 푸른 색의 작은 유리잔에 담아주기 때문에 그 앞에서 마시고 컵을 반납해야 했다. 짜이가 담긴 유리잔은 따끈했다.

 




   색은 딱 밀크티, 또는 더위사냥 색. 위에는 불투명한 우유막이 한 커풀 덮여있었다. 후후 불면서 냄새를 살짝 맡아보니 생강향과 홍차향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한 입 후룹. 아, 이런 맛이었구나. 이건 내가 처음 먹어보는 맛이 확실해. 근데 어딘가 포근해진다. 왜일까?






   단순히 '생강향이 나는 밀크티' 정도의 말로는 절대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맛이었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어른스러움이 느껴지는 맛. 인도표 향신료가 가득 담긴 이 짜이 한 잔엔 인도가 담겨 있었다. 낯선 땅에서 낯선 음료를 마시는 이 완전히 새로운 체험은 오히려 알 수 없는 포근함을 선물해주었다. 설렘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탓에 잔뜩 올라가 있던 어깨는 짜이 한 모금에 조금씩 내려갔다.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새로운 눈을 뜨고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꼭 인도에 적응하는 마법의 물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어제 밤부터 새까맣던 델리가 비로소 제 색으로, 아니, 어쩐지 짜이빛으로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짜이 맛집의 알 수 없는 가루들엔 정말 '인도패치'같은 것이라도 들어있던 것일까? 짜이 한 잔이 준 인도식 포근함 덕분인지 긴장을 풀고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거리를 다니는 것에도 두려움을 느끼던 여행자는 어디 가고 혼자 씩씩하게 야간 기차 탑승에도 성공했다. 이후 인도여행을 하며 수없이 많은 짜이들을 먹었다. 그치만 왠지 그 집 짜이가 준 따끈함엔 비할 짜이는 찾을 수 없었다. 인도에 다시 가게 된다면 꼭 그 집 짜이를 다시 맛봐야지. 인도 물약은 그때도 빛을 발할까?


   온통 새까맣던 인도에서 찾은 두 번째 빛깔, '짜이빛' 델리를 다시 후루룹 마시고 싶어진다.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내리자 마자 보이는 강렬한 풍경. 누가 봐도 '당신은 인도에 왔습니다' 느끼게 해주는 듯 하다.


당시 나름 감격에 겨워 찍었던 '웰컴 투 인디아'


공항 문만 나서면 바로 보이는 흔한 길 강아지들. 느낀 바로 인도엔 소보다 흔한 게 개다. 이땐 아직 신기했던 터라 "야, 너 여기서 뭐해" 정도의 느낌으로 사진을 찍어두었었지.


정신도 없고, 낯설고, 반 쯤은 무서웠던 그때 심리를 너무나 잘 나타내주는 듯 제대로 흔들린 사진



진정한 로컬 맛집, 짜이 노점! 주변의 모두가 인도 사람들이라 어쩐지 일상에 끼어든 느낌에 사진을 찍기도 조심스러웠다.





   여행 첫날, 빠하르간지에서 처음 산 인도 옷. 인도에는 현지에서 옷을 구입해 인도 스타일로 입고 다니는 여행자들이 대부분이다. 왠지 한국에서도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후드티 스타일의 옷과 편안하고 시원한 알리바바 바지를 한 가게에서 구입했다. 두 벌 합쳐서 500루피, 단돈 팔천 원!










이전 01화 이제 이 여행기를 끝낼 때가 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