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같은 친구, 친구 같은 연인
결혼으로 이어지는 몇몇의 연애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연애의 끝은 이별이다. 따라서 연애의 종착은 이별일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우리가 연애를 할 수 있는 건 그 끝을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별을 예상하면서도 연애를 시작했던 것 같다.
그와 연애를 한지 두 달이 막 되어갈 무렵, 그는 2년 동안 해외봉사를 가고 싶다고 말했었다. 오랫동안 꿈이었는데 마침 지원서를 받고 있다고 말이다. 기가 막혔었다. 이제 막 50일 정도 사귀고 700일을 기다려 달라는 것일까, 헤어지자는 말을 돌려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 남자는 왜 나와 연애를 했던 것일까 의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연애 초엔 연인 같은 친구로, 또한 친구 같은 연인으로 지냈다. 그는 이전 연애의 구속에서 지쳐했고, 나 또한 그를 만날 때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연애가 좋다고 밝혔다. 그래서 우리는 편한 연인을 모토로 했고, 나는 서로에게서 자유로운 그 관계가 이상적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해외봉사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연인과 친구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연인과의 마찰을 꺼려했으나 서로가 같은 길을 걷기 위해선 상대방과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나는 그와 미래를 같이 하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날 선택할 것을 요구했고, 그는 해외봉사를 포기했다. 그 때부터 나는 그와의 만남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해외봉사를 포기한 이후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했다. 아이는 딸이 좋다. 자긴 딸 바보가 될 것이다. 한 달 전까지 2년 해외봉사를 간다던 사람이지 않나. 그와 나는 나이가 많은 편이 아니었고 그의 말을 그저 농담과도 같이 여겼다. 그가 나와 사귄 것이 전 여자친구를 잊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고, 지금 결혼을 이야기하는 건 해외봉사를 포기하면서 반대급부로 떠오르는 충동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나는 결혼에 소극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던 중 하루는 그가 술에 잔뜩 취해서 나에게 자신과 결혼이 하기 싫은 거냐며 눈물을 보였었다. 그를 보면서 나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정말 나와의 연애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혹시 내가 결혼이 무서워 그의 마음에 진지하게 답을 못하는 건 아닐까. 나는 그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따져보았다. 차분하게 그의 수입과 나의 수입을 계산하고 미래를 설계해보았다. 집에서 머물던 시간보다 그의 자취방에 머물던 시간이 길어진 것은 아마 그때쯤이었다.
우리의 연애가 삼 년째에 접어들면서 안정기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사이 2번의 해외여행을 더 다녀왔고, 스무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세 개의 커플링을 맞췄고, 우리의 옷장엔 계절별로 커플 옷이 생겼다. 연애 초에 있던 다툼이 사라졌고 그에 대한 믿음이 강해졌다. 나는 우리의 기념일이면 금을 한 돈씩 선물했다. 매년 모아서 우리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선물로 주기 위해서였다. 그와 나는 천천히 결혼을 준비했다. 웨딩박람회를 다녀오고, 신혼부부 주택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이별을 고한 건, 우리가 신청한 신혼부부 주택 발표가 1주일도 남지 않았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