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 아빠의 배신
-내가 김미영이야.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입에 물었는데 앞에 있는 여자가 말했다.
드라마를 보면 보자기에 머리를 싸매고 구질구질한 옷을 입은 여자가 “내가.. 내가.. 니.. 엄마.. 야” 하면, 자식이 뚜둥~ 하는 눈빛으로 친엄마를 쳐다본다. “어… 엄마?” 둘은 얼싸안고 오열한다.
나를 키워준 엄마가 친엄마의 이름을 말해 주고 떠났을 때. 친엄마가 어떤 모습일까 종종 상상했다. 할머니랑 같이 목욕탕에 가서도 ‘저기 있는 아줌마가 김미영일까? 저 아줌마처럼 우리 엄마는 생겼을까?’ 상상했고, 집 밖에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찾아오는 꿈까지 꿨다.
근데, ‘롯데리아’라니!
내 앞에 있는 여자분은 상상했던 58개의 엄마 이미지와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 투피스 정장을 차려 입고, 짧은 생 단발머리를 하며 앉아있던 40대 초반의 엄마는 훗날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 늘 이렇게 말했다.
(엄마) 네가 자꾸 나한테 언니 언니~ 하는데. 그건 좀 아니더라고! 이모라고 불렀으면 아마 좀 더 참았을 텐데…
아빠가 공장에 와서 알바를 하라고 해서 방학을 이용해 간 날이었다. 아빠 공장에서 일하는 언니와 함께 옷을 사 입으라고 백화점 앞에 내려줬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이 젊은 언니는 뭐지? 아빠랑 뭐 있는 건가?’ 불편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김미영이야. 네 이름 지어 준 사람.
-아.. 네에..
대답을 하고 남은 햄버거를 우걱우걱 먹었다. 눈물도 없었고 얼싸안음도 없었다. 극적인 드라마 없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했다. 내 친엄마가 생각보다 예쁘고 젊어서 마냥 좋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나는 친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미혼모의 몸으로 유부남인 아빠를 만나 나를 낳은 엄마는 아빠에게 나를 맡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실패했고 지금의 내 동생을 데리고 이혼했다.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겪은 사람들이 다시 만나서 꾸린 가정. 무엇보다 친엄마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친엄마와 함께 시작한 두 번째 가정은 내게 희망 그 자체였다. 엄마는 나와 참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반대인가?) 우리는 수다를 떨다가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기도 했고, 이성 친구에 대한 고민도 젊은 엄마답게 명쾌하게 해결해 줬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 지금까지도 엄마는 내게 그런 존재다. 내 엄마라 감사한 사람.
하룻밤에 막내딸에서 장녀로 새 삶을 시작했다. 8살 차이가 나는 어린 여동생도 외동딸에서 막내딸로 새 삶을 시작했다. 서로 다른 성을 가진 우리였지만 개의치 않고 살기로 했다.
그러나 아빠가 문제였다. 엄마를 사랑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언성이 높아지면 욕을 했고, 욕을 하다 못 참고 엄마의 얼굴을 후려 쳤고, 사람들 앞에서 엄마의 머리채를 질질 끌고 들어가서 사무실 안에서 엄마의 고운 피부에 멍을 들게 했다. 어렸을 때는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지만. 조금 머리가 큰 나는 엄마가 맞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둘이 싸울 때 그 중간에 서 있기를 자처했다.
가족 중에 유일하게 아빠에게 한 번도 맞지 않은 내가. 아빠의 아픈 손가락인 내가 서 있으면, 아빠는 엄마를 때리지 않았다. 대신 나는 아빠의 욕지거리와 고성을 벌벌 떠는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아빠의 폭력을 엄마가 10년 넘게 버틴 이유는 어린 나를 두고 떠났던 ‘미안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태어난 게 한스러웠다. 엄마를 너무 사랑하는데 엄마의 발목을 내가 잡고 있는 기분이었고, 아빠는 끊임없이 나를 이용해서 엄마를 곁에 두려고 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는 존재 때문에 이렇게 상처를 받아야 한다니. 죽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던 학창 시절이었다.
아빠가 나를 배신했다.
내 두 번째 희망마저 앗아간 것이다.
그 시절 아빠는 나의 가장 큰 증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