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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나무 Sep 05. 2020

임시개통 세상

 아슬아슬한 선 하나에 의지한 채 임시로 이어지고 있는 삶이다

 어제 저녁 별안간 인터넷이 중지되었다. 넷플릭스에서 요즘 한창 재미 붙인 드라마 한 편을 불러놓고, 막 밥 한 술을 뜨고 있을 때였다. 두부구이 옆에서 포근한 질감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던 남자가 돌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위로 네트워크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떴다. 그리고는 그만이었다. 밥 먹을 때까지만 짐짓 사정을 봐주거나, 마음을 정리하도록 잠시 기다려주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가득 채웠던 그라나다의 근사한 야외 카페와, 낡은 호텔을 거액에 사겠다고 제안하던 포근한 목소리의 남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쉽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설정을 확인해 보고 전원 스위치를 껐다 켜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같은 지붕 아래 옆집에 사는 동생도 마찬가지 사태를 접하고 확인 차 다녀갔다. 외부 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식어버린 국을 데우고 책 한 권을 골라 다시 식탁 앞에 앉았다. 좋은 습관은 아니라지만 밥 먹으며 책 읽는 걸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하지만 책은 언젠가부터 화면에 밀려났다. 시력이 약해진 뒤로 식탁에서 자잘한 글자를 들여다보는 게 내키지 않았다. 책은 두고 오롯이 식사를 하면서 새삼스레 집안을 둘러보았다. 마당을 향한 어둑한 창에 밥을 먹고 있는 한 여자가 비쳤다. 그리 늦은 시각도 아닌데 창밖의 어둠은 짙었다. 해만 넘어가면 순식간 기온이 내려가고 철벽 같은 어둠이 주위를 에워싸는 산속에 나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집을 짓고 동생과 나란히 이웃으로 살기 시작한 처음 몇 년은 화면 따위 없어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창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나날이었다.     

     

    2013년 가을, 이곳에 막 당도한 우리 자매는 도시에서 누리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인터넷도 그중 하나였다. 집이 완성될 무렵 통신사 직원이 두어 차례 다녀갔다. 통신 전신주 이십 여대를 개인비용으로 세우면 가능한 일이라고는 했다. 너무 큰 금액이었다. 이년 여에 걸쳐 낮은 산 위에 집 한 채를 올리는 동안 우리는 온갖 별의별 지출로 엔간히 지쳐있었다. 애초에 넉넉한 자금이 있어 벌인 일이 아닌 데다, 예상보다 많은 비용이 토목공사에 들어가 버렸다. 남은 자금으로 간신히 집을 지은 참이었다. 추운 지역이라  20 센티미터 두께의 샌드위치 패널로 벽을 세우고, 지붕도 그에 맞게 두툼하게 씌우는 것에만 특별히 마음을 썼다. 다른 것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48평 긴 대합실 같은 내부의 중간엔 벽 대신 미닫이 벽장을 만들어 동생과 집을 분리했다. 각자 현관을 따로 내고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했다. 내부는 둘 다 원룸으로 터놓길 원해서 욕실만 벽을 세워 갖춘 단순한 구조로 완성되었다. 지붕과 벽체 패널을 비롯해 내부 나무판이며 타일, 싱크대 상판까지 자재구입은 일일이 공장을 찾아다니며 했다. 필요한 인력도 최소로 들여 전문적인 부분만 도움을 받았다. 마무리 단계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면 과감히 생략하거나 중단하기도 했다. 바닥에 온수 선은 깔았지만 정작 보일러 시설은 포기하는 식이었다. 그 대신 선택한 건 장작난로였다. 추위를 각오하니 마음은 편해졌다. 도시가스가 아닌 기름으로 난방을 하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지 걱정스럽던 것도 잊을 수 있었다.


   “일단 살아보고 정 안되면 그때 설치하는 거야.”

  우리는 보일러 때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포기할 때도 다소 홀가분한 마음으로 말했다. 매달 나가는 통신비도 절약할 수 있었다. 차로 이십 여 분 걸리는 읍내엔 다행히 피시방이 몇 개 있었다. 꼭 필요한 검색은 폰 데이터를 사용하고, 파일을 받고 전송해야 할 때는 피시방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이 지나가기 전 알게 되었다. 보일러 없이도 인터넷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생활에 다시 인터넷이 연결된 건 그로부터 사 년 뒤인 2017년 2월이 되어서였다. 동네 80세 넘은 한 어르신의 배려 덕분이었다. 우리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도로변 이 층 벽돌집에 사는 남자 어르신인데 하루는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아들이 인터넷 없이 못 사는데 엊그제부터 안 되는 거야. 그래 연락했더니 지금 사람이 나왔어. 차장하고 기사가. 차장이 이번에 새로 왔대. 그래 그 집 얘길 내가 했지. 전봇대 안 세우고 연결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가 봐야 방법을 알 수 있겠대. 그래 여기 일 끝나면 거기 가보라 할까 싶어 전화한 거야.”

  느리게 이어지는 어르신 말씀의 요지는 인터넷을 임시로 연결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우리 사정을 알아 마음을 써준 어르신이 고마웠다. 하지만 선뜻 응하기엔 마음이 복잡했다. 인터넷을 포기하는 것도 쉬운 건 아니었지만, 이제와 인터넷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익숙해진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상의 세계와 넘치는 정보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일도 좋았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피시방 나들이도 싫지 않았다. 가는 길엔 장도 보고 도서실에 들려 올 수도 있었다. 읍내엔 도서관이 없는 대신 마을회관에 청소년을 위한 도서실이 있어 책을 빌려주었다. 더구나 그즈음 읍내엔 와이파이가 가능한 커피숍이 처음으로 생겼다. 노트북을 들고 가 커피 향을 실컷 맡으며, 도시의 한 모퉁이에 있는 기분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어르신과의 통화를 잠시 중단하고 동생을 불렀다. 변화가 달갑지 않은 나와 달리 동생은 망설이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연결해야지, 무슨 소리야!”  


  그날 집에 다녀간 통신사 사람들은 다음날 다시 찾아와 주변 산을 오르내리며 어렵사리 선을 끌어 임시개통이란 걸 해주었다. 라디오로 날씨 정보나 이따금 챙겨 듣던 우리 산골엔 그로써 도회지의 팔 차선 같은 문명이 대번에 펼쳐졌다. 어디로든 바삐 가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이 이내 일었다. 자칫 길을 잃을 것 같은 불안감도 생겼다.   

  “아는 길이 아니면 혼자 잘 가지도 못하면서 뭘 그래.”

 동생은 내 감상을 일축했다.

 “아는 길에서도 번번이 길을 잃는 주제에.”

 나는 같잖아하며 말했다. 실제로 심한 길치인 동생은 가까운 읍내에 몇 년째 다닐 때까지 이따금 ‘여기가 어디야?’라고 묻는 것으로 나를 무섭게 했다. 오프라인에서는 주춤 내 뒤를 따라오는 동생이 온라인에서는 앞장을 서는 편이다. 뭐야, 문제가 뭔데? 하는 태도로 자잘한 문젯거리 정도는 해결해 준다. 그래 봤자 둘이 합쳐 겨우 한 사람 몫이 나올까 말까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화면 속이든 밖이든 수월치 않은 세상으로 그나마 한 발이라도 디딜 수 있는 건, 둘이 함께하기에 가능한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았다.

 

  언젠가 도로에 나갔을 때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인터넷 선을 추적해 본 적이 있다. 어디서부턴지 멀리서 검고 가느다란 선이 길가에 설치된 난간 뒤로 따라오고 있었다. 마른풀 더미에 얹히고 무성한 수풀에 묻히기도 하며, 보이다 말다 이어진 선은 진입로 입구 전봇대에 이르러 높이 솟구쳤다. 그 뒤 한참 허공을 가로질러 뽕나무 고목이며 다른 무수한 나무들에 걸쳐져 우리 집으로 오는 산을 넘고 있었다. 우리가 곧잘 땔감을 하러 오르는 마당 옆 산이었다. 마당에서 몇 걸음만 오르면 산마루에 닿는 터라 그곳까지만 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비탈 위에 다다른 선은 한숨 돌리듯 오래된 밤나무의 굵은 가지에 몇 바퀴 몸을 감았다가, 마침내 마당으로 늘어져 동생네 부엌 창 옆의 뚫린 구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참으로 어설픈 여정이었다. 세찬 바람 한 줄기나, 지나가던 농부의 무심한 낫질 한 번에도 쉽사리 끊어질 것만 같았다. 흔들리는 모양새가 수상하다고 여긴 산짐승이나, 고양이의 발톱에 한순간 낚일 수도 있었다. 미덥지 않다 해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찌 보면 우리 삶도, 그런 아슬아슬한 선 하나에 의지한 채 임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짐짓 사정을 봐주거나, 마음을 정리하도록 잠시 기다려주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

     

  인터넷이 들어오고 두 해가 지나는 동안 우리 생활은 많이 변했다. 무엇보다 일상의 중심이었던 ‘천천히 걷기’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걷는 자매’라고 부를 정도로, 우리는 거의 날마다 주변 산길이며 도로를 걸어 다녔다. 특히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아랫마을에서 우리 마을을 거쳐 고갯마루까지 이어진 도로는, 차량이 많지 않아 걷기에 좋았다. 낙엽송이며 잣나무 같은 침엽수림 사이로 길이 난 터라, 도로라기보다는 숲 사이를 걷는 느낌이었다. 길가엔 또 벚나무가 일렬로 심어져 봄이면 환한 벚꽃길이 되어 주기도 했다. 계절과 일기에 맞추어 가장 걷기 좋은 시간대에 동생과 두어 시간 천천히 걷고 돌아오는 것이, 내겐 큰 기쁨이었다. 해가 길어지고 짧아지고, 춥고 덥고 습하고 건조해지는 그 모든 것을 숲의 변화와 함께, 몸으로 느끼는 것도 좋았다. 도시에 살 때 산골을 간절히 원했던 내 마음엔 한적한 숲길을 실컷 걷고 싶다는 바람도 컸다. 날마다 누리던 그런 나의 기쁨이 하루씩 걸러지다, 이제는 이따금 특별하게 누리는 것이 되었다. 변화를 불러온 가장 큰 요인은 물론 인터넷의 연결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이 따로 있었으니 바로, 고양이었다.

     

  온몸에 털이 보송보송한 작은 동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 있다. 내 동생이 그렇다. 이사 초기 몇 년 동안 우리 마을에선 고양이를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높은 지대라서인지, 집이 드문드문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산책길에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를 따라왔다. 가을이었고 인터넷이 연결되기 대여섯 달쯤 전이었다. 그 뒤로 우리 마당을 찾아오는 고양이가 한둘 씩 더 생겨나 인터넷이 들어왔을 땐 네댓 마리가 되어 있었다. 고양이의 등장과 때맞춰 네트워크 연결이라는 조합은, 생각지 못한 곳으로 동생을 이끌었다. 고양이를 돌보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느라 자주 유튜브 영상을 접하더니, 자신도 비슷한 영상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고양이라는 동물과 영상 편집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동생은 점점 매료되어 갔다. 한동안 그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뭔가에 한 번 빠지면 아무도 못 말리는 동생의 집요함을 나는 간과했다. 동생 유튜브는 몇 달 지나지 않아 구독자가 천 명이 되었다. 구독자는 대부분 길고양이를 돌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응원에 힘입어, 동생은 지금까지도 고양이들을 돌보고 그 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다.


  동생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그사이 새로운 세상을 기웃거리느라 나름대로 바쁜 처지였다. 읍내 도서실을 가는 대신 작가 김영하의 ‘책 읽어 주는 팟캐스트‘를 발견해 한동안 즐겨 들었고, 궁금한 것들을 검색하다 뭉텅 시간을 뺏기기도 했다. 도시에 사는 딸이 넷플릭스에 가입한 덕에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장보기에도 맛을 들였고, 실시간 뉴스도 챙겨 보게 되었다. 파일을 주고받기 수월해지면서, 전부터 해오던 문서 교정 일도 좀 더 할 수 있었다.


  일상의 형태는 변했지만 네트워크 연결 전이나 지금이나, 사는 일의 정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소한 즐거움 하나만 있어도 고마운 하루인 것이다. 오늘도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식탁에 가서 앉는다. 좀 전 버섯구이를 만들어 동생에게도 한 접시 들려 보냈다. 동생도 나도 혼자 밥 먹는 게 편한 사람들이다. 아, 어제 저녁 끊겼던 인터넷은 오늘 오후에 복구되었다. 향긋한 버섯구이 한 점을 입에 넣고 가볍게 화면을 두드린다. 그라나다 카페의 남자가 나타난다. 남자는 다정하게도 어제 멈췄던 그 자리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산골 아줌마의 이런 표현은 좀 그런가. 아무러면 어떠랴. 임시개통 세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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