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꼽아 기다린 4일간의 설 연휴가 끝났다. 3일 동안은 부모님 곁에서 음식도 하고, 동생 부부도 맞이하고, 친척과 외식도 하고, 설특집 방송도 보면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빠의 상태도 순간순간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었지만, 아빠도 긴 연휴 동안 잘 버텨 주었다. 연휴 셋째 날에는 오랜만에 북적였던 집이 갑자기 훅 조용해지고, 치매에 걸린 후 좀 더 대하기 어려워진 처가 식구들과 백화점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서인지 갑자기 아빠의 기분이 나빠지고 예민해졌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밤에 잠은 푹 주무셨다.
매일매일 아빠와 시간을 보내는 엄마에겐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아빠와 계속 함께해야 하는 연휴가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니다. 아빠의 말투, 한숨, 눈 깜빡임, 행동, 손떨림 등의 변화에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나는 늘 긴장한 채로 아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핀다. 이런 긴장감을 억지로 풀어보고 외면하려고도 해 보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초기에 이러한 변화를 감지해서 시선과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면 아빠는 더 큰 망상과 혼란에 잠식되고 말기 때문이다. 혼돈의 기미가 보이면 아빠의 손을 잡거나, 다른 화제로 말을 걸거나, 아빠가 관심을 보일만한 자극적인 영상을 틀어주면서 아빠의 마음의 문을 쉴 새 없이 두드린다. 그리고 이 과정 중에 툭툭 터져 나오는 아빠의 가시 돋친 말들에 상처받지 않고 고분고분 맞춰주려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쉽지는 않다. 이러한 시간이 조금씩 누적되다 보면 아빠를 감당할 수 있는 나의 역치도 함께 줄어들어, 어제와 동일한 상황임에도 나의 속은 어제와 달리 부글부글 끓곤 한다.
그래서 이번 연휴의 마지막 날은 가족과 조금 떨어져서 있기로 했다. 거창하진 않지만, 오전에는 운동하고, 오후에는 글도 쓰고 사람도 만나기로 했다. 엄마를 위해 너무 늦게는 안 들어가려고 조금 이르게 저녁 약속을 잡았다. 그래야 조금은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다음날 출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일 동안 잠잠하다가도 잠깐 한눈팔면 훅 넘쳐버리는 냄비처럼 이따금씩 끓어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아빠를 밀착 마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이 하루의 보상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휴의 마지막날이 되어 정말 오랜만에 전에 살던 집 주변의 요가원을 찾았다. 오랜만의 연락에 선생님은 정말 반가워하며 수련을 예약해 주셨다. 마음 같아선 힘들게 2시간짜리 수련을 예약하고 싶었지만, 나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 시간짜리 휴식에 초점이 맞추어진 수련을 예약했다. 바람은 아직 차가운 듯했지만 눈보라가 치던 전 날과는 달리 거리마다 따뜻한 햇살이 가득했다. 조금 서둘러 갔더니 주차장도 딱 한자리가 남아 있었다. 예전에 살던 동네 골목골목에서 스며 나오는 켜켜이 쌓여있던 추억과 맞물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거창한 이벤트에서 오는 짜릿한 행복도 분명 두 손들어 반길 일이지만, 일상의 소소함이 퍼즐 조각처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을 때의 뭉근한 기쁨도 비할 데 없이 벅차다.
요가원은 변함이 없었다. 나의 기분 탓인지, 새로 들여놓은 히터 탓인지 오히려 전보다 더 포근하고 따뜻했다. 얼굴이 좋아졌다며 반갑게 맞아주시는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어디 두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나의 요가매트를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결국 선생님이 찾아주신 나의 매트는 먼지가 소복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물티슈 대신 하얗게 빨아두신 수건에 물을 묻혀 매트를 닦아내니 잘 보이지 않던 먼지까지 한데 뭉쳐져 먼지 덩어리가 검게 묻어 나왔다. 그렇게 한동안 발길 닿지 않았던 매트 위의 세월을 닦아내었다. 수련이 시작되고 선생님의 목소리에 맞추어 하나하나 동작을 수행해 나갔다. 운동을 쉬지 않은 덕분에 수행하기 벅찬 동작은 거의 없었지만, 굳어진 몸을 깨워내느라 좀 시간이 걸렸다.
"후우-"
수련이 중반을 넘어가고 다리를 평행하게 포개어 상반신을 푹 숙여내는 동작에 이르렀을 때. 오랜만에 나의 깊은 숨소리를 들었다. 코로 깊게 들이 마신 숨이 몸을 거쳐 다시 천천히 토해지는 몇 초 간의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내 맘 같지 않고, 내가 선택한 삶이긴 하지만 내 삶이라곤 생각되지 않던 일상 속에서도, 결국 나는 나의 하루하루를 살고 있구나', '내가 생각보다 깊이 숨을 마시고 내쉬며 잘 살아가고 있구나'를 느낀 순간. 그 당연한 순간이 고맙고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선생님의 요가 수련은 나에게 많은 공간을 내어준다. 그 공간 속에서 나는 나의 움직임과 호흡을 따라가며 나를 조금씩 마주하게 된다. 여느 요가 선생님들처럼 완벽한 몰입이나 거창한 깨달음의 경지까진 평생 도달하지 못할 것 같지만, 이따금씩 내가 잘 살아가고 있구나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매트 위에 서서 땀을 흘릴 이유는 충분하다.
그래. 잘 살아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