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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랭이꽃 피어있는 언덕

류시화 시 <패랭이꽃 피어 있는 언덕>

by 따시

너무 많이 읽어 여러 번 접힌 편지처럼

패랭이꽃 피어 있는 언덕에서

마음에 접혀 있는 것들 하나둘 떠나 보내며

떠나 보내는 법을 배웠다

류시화 시 <패랭이꽃 피어 있는 언덕> 부분


여름이 중간쯤 흐르고 있을 때, 도자공원 한 귀퉁이에 가면 패랭이꽃을 닮은 작은 꽃들을 만날 수 있다. 언덕은 아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조각가의 작품과 작품 사이 평지 공간이다. 산책길에 흰 나비들을 따라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꽃밭이다. 그곳에 가면 저절로 고개가 숙어지고 무릎이 굽어진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꽃들과 눈높이를 같게 해야 한다. 그 꽃들 사이에서 낮게 움직이는 하얀 나비들을 만나야 한다. 나의 육중한 발바닥을 조심하며 까치발로 걷고 숨소리도 작아진다. 바람이라도 산들거리면 눈앞은 황홀경이다. 나는 없고 꽃과 나비의 춤만 있다. 산책도 잊고, 생각도 잊고 그들과 함께 어우러진다. 이렇게 한세상 살아가고 싶다는 느낌. 인생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해 주었구나! 하는 느낌이 온몸으로 스민다. 지나온 삶에 어렵고 힘든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명치 끝에 걸려있는 밥알처럼, 마음의 창자에 콕 박혀 길을 터주지 않던 힘든 감정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너무 많이 읽어 여러 번 접힌” 감정은 너덜너덜해져 이제 그만 내 손을 떠나고 싶어 한다. 별것 아니다. 별것 아닌 것을 그토록 깊숙하게 마음에 간직했었던 거다. 놓아주면 그뿐이다. 마음에서 펼쳐 손바닥 위에 놓으면 바람에 꽃잎 날리듯 훨훨 날아가 버릴 거다. 패랭이꽃은 꽃송이도 작지만 줄기가 매우 가늘다. 무게를 재어 보진 못했지만 가는 줄기를 위해 종이처럼 가볍게 꽃잎을 피웠을 거다. 줄기가 바람에 흔들릴 때 꽃송이도 함께 흔들린다. 마음과 몸이 꽃과 줄기를 닮았다. 꽃이 없는 줄기가 꽃이 될 수 없듯이 마음이 없는 몸도, 몸이 없는 마음도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서로 보살펴야 한다. 절대로 잊을 수 없다는 것은 미련이다. 잊지 않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안다. 그것이 정말 내 삶에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마음에 접혀 있는 것들 하나둘 떠나보내며”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 어렵고 힘든 감정들은 연애편지가 아니다. 고이 접어 마음에 넣어두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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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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