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절기
정월에 들며 우수라는 말은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말이니 이제 추운 겨울이 가고 이른바 봄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태음태양력(음력)에서 정월은 계절상 봄에 해당된다. “우수 뒤에 얼음같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는 슬슬 녹아 없어짐을 이르는 뜻으로 우수의 성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입춘이 지나고 정월대보름이 있었다. 특별히 우리가 한 것은 없었다. 엄마, 아빠도 바쁜 나날들이었고 아기도 그랬다. 예전에는 증조할머니께서 나물을 하셔서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오곡밥과 10종류가 넘는 나물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난생처음 다양한 종류의 나물을 먹었던 것 같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오곡밥과 몇 가지나물을 해줬던 기억은 나지만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우리는 아직 아기에게 나물을 해줄 수 없다. 아기가 제대로 못 먹는 것도 있지만 할머니나 어머니같이 음식 실력이 좋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정성스럽게 만들어 같이 먹을 날이 오지 않을까?
정월 대보름이 지나고 우수(雨水)가 찾아왔다. 우수는 눈이 녹아 비가 된다고 했지만 아직 날씨는 그렇지 못한 듯했다. 영하권의 날씨가 계속 이어지더니 눈이 내리기도 했다.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예전같이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더 어려워진 것이 한 두 해가 아니기에 그리고 우수라고 하여 특별히 준비하는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거의 기억하지 않고 지나는 것 같다. 입춘이 지나고 3월 경칩을 맞이하기 전까지 우수는 그저 기억하지 못하는 하나의 절기인 듯하다.
그렇지만 우수가 있던 그 사이 우리의 삶도 조금씩 변화를 맞이했다. 사실 이사는 12월부터 시작이었다. 아기가 커가면서 더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었고 이제 복직하니 회사와도 조금 더 가까운 곳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와 상의 후 살고 있던 곳을 처분하고 새로운 집을 알아보았다. 집을 처분하는 것이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어 이사를 못 가는 것은 아닌가 했지만 그래도 운 좋게 집을 사겠다는 분이 계셨고 우리는 집을 팔고 새로운 집을 구했다. 그리고 2월에 이사를 하기로 했는데 그날이 온 것이다. 우수가 지나면 날씨가 조금은 더 따뜻해져 조금 수월하기를 바랐지만 예상밖과 달리 추웠다. 아내와 이삿날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를 했으나 결국 어머님(장모님)의 의견대로 아기를 맞기 기로 했다. 아기는 장모님께서 연차를 내셔서 봐주시기로 하고 우리는 이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마 이날이 아내와 내가 아기와 처음 떨어져 생활하는 날이었다. 둘은 그렇게 아기를 잠시 맡기고 부동산과 이사 나갈 집, 이사 갈 집을 바쁘게 다녔다. 예전 자취할 때부터 이사를 수없이 했지만 아기가 있는 삶은 조금 달랐다. 우리 짐도 많은데 아기 짐도 꽤나 많았다. 오전 일찍 시작된 이사는 오후 늦게 어느 정도 끝났다. 짐은 다 풀었으나 끝난 것이 아닌 이사... 원래는 아기를 데리러 아내가 갈 예정이었으나 불가능하게 되었다. 장모님께서는 당연히 그럴 줄 알고 계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3일째 되는 날까지 아기와 떨어져 짐을 정리하고 또 했다. 금방 끝날 것 같은 짐정리는 끝나지 않고 정리가 덜 된 상태에서 아기는 집으로 왔다. 3일 만에 보는데 낯선 표정을 짓는 아기를 보니 조금은 서운했다. 그래도 곧 엄마, 아빠를 찾는 아기와 함께 새로운 집에서 세 가족이 함께 지내게 되었다. 현재 이사 온 집은 예전에 비해 더 좋은 환경임에 분명하다. 함께 나갈 곳도 많고 동네가 조용하며 쾌적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아기는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이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우리 역시도 새로운 곳이지만 그래도 익숙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기는 다르다. 너무 어려서 어떤 곳인지 체감은 못하겠지만 분명 보고 느끼는 것이 달라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눈이 녹아 비가 되는 '우수'처럼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될 아기의 삶이 이제 시작된다. 여기서 누구를 만나며 어떤 추억을 쌓아갈지 기대가 되는데 아기도 그랬으면 좋겠다.
어제보다 더 성장하고 있는 아기는 이제 곧잘 걷는다. 가끔은 뛰기도 하는데 신기한 것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지나가는 사람에게 손도 흔들어 주고 인사를 하기도 한다. 아기가 귀한 동네에서 그래도 아기가 많이 보이는 동네의 삶이 아기에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추운 겨울이 거의 다 가고 이제 경칩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아직도 아침, 저녁은 춥지만 낮엔 따뜻하니 갈 곳이 더 많아질 것이다. 도시의 문명과 자연의 변화를 함께 느낄 아기의 내일도 더 행복한 나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경칩의 삶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