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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Oct 20. 2020

할머니의 김치 비밀

정리와 습관

나의 엄마는 나의 딸들의 할머니다. 본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딸들의 어린 시절 일기를 읽다 보니 실감하게 된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일기를 몰래 읽었는데, 이제 딸들과 함께 읽으면서 '그때 그랬지'하고 웃을 수 있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3월에 쓴 일기를 첨부한다.

딸의 일기 원본사진

나의 부모님께서는 김치를 담그실 때마다,  늘 두 분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주로 양념을 넣는 것을 두고 다투셨다. 그래서 엄마는 마음대로 몰래 양념을 넣을 수 없으셨다. 주로 아빠의 입맛에 맞추셨다. 그러던 어느 날, 김치를 담그시다가 아빠 눈치를 보시며 몰래 설탕을 넣으신다는 것이 뭉텅 떨어뜨리게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딸의 일기 덕분에, 두 분의 김치 담그실 때 모습을 회상해 본다.


티격태격 엄마와 아빠의 김장모습

전통적으로 한국인의 식탁에 빼놓을  없는 요리가 김치다. 최근 젊은 층에서는 김치 없는 식사를 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같다. 나의 딸들도 최근에는 거의 김치 없이 산다.


반면 나는 김치 없이는  산다. 신기한 일은 나도 외국에 나가면 김치 생각이  난다. 하기는 외국에서  개월씩 살아보지 않아서 향수병에 걸려보지 않았다. 외국여행을 가지 않고 한국에 있다면 365  거의 하루에  끼라도 김치를 먹어야 하는 나는 어쩌면 입맛이  습관에 젖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묵은지, 무우김치, 배추김치, 총각김치, 전주 콩나물국밥, 모주


큰딸의 경우, 일본 유학 간지 한 달 되었을 무렵, 나에게 김치 좀 부쳐달라고 했다. 일본 음식을 아주 좋아했지만 어느 날 딱 질리는 순간이 온다고 했다.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김치를 많이 보냈다.


항상 그런다. 딸이 어릴 때, 만약 무슨 반찬이 좋다 하면 숟가락에 자꾸 올려주었다. 지금은 아이들과 거주하지 않아 숟가락 위에 올려 줄 일이 없다. 대신 무엇이 좋다고 하면 양을 너무 많이 보낸다. 딸이 싫어하는 일인데 말이다. 일본 유학 때도 너무 많이 보내서, 또 한소리 들었다. 혼자 못 먹어 같이 유학하는 한국인 친구들과 나눠 먹었다고 했다.


나는 다양한 종류의 김치를 모두 좋아한다. 특히 큼직하게 썰어서 담근 무김치와 고들빼기김치가 맛있다. 엊그제 콩나물 국밥집에 가니, 두 종류가 무료로 제공되어서 밥 한 그릇 더 주문해서 국에 탁 말아서 김치와 뚝딱 맛있게 배불리 먹었다. 전주 콩나물 국밥집은 밥이 미리 말아져 있는데, 평소에는 밥이 더 필요가 없었다.


한국인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김치 냉장고의 발명이다. 김치가 잘 숙성되어 유산균과 각종 유기산이 많아진 맛 좋은 김치를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독에 넣어 땅에 묻은 김치의 맛을 완벽히 재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다수가 집합주택에 사는 현대인에게 김치냉장고는 환상적인 전통의 맛과 상당히 유사한 맛을 선사한다.


묵은지를 이용한 찜과 찌개류는 대다수의 한국인이 좋아한다. 나는 말만 들어도 군침이 나올 정도다. 그러나 묵은지 김치찜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끓여야 해서 집안에 냄새가 심하게 배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 조상들의 주거양식은 부엌과 식사하는 곳이 완벽히 분리되어 있었고, 김치 또한 외부에 보관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청국장이나 된장을 발효시킬 때를 빼면, 방안에 그리 심하게 발효음식 냄새가 진동하게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바뀐 주거 환경에 맞춰, 요즈음 청년층의 요리 문화가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딸들의 일기장은 옷장 정리와 책장 정리를 하다가 찾은 보석이다. 나의 아이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현재까지 타 도시에서 생활해서 지금은 일 년에 두세 번 온다. 그런데도 아이들의 책장은 나의 책과 뒤섞여서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 나는 '정리'를 못하는 사람이다. 항상 무엇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인생의 많은 시간을 '잃어버린 것들을 찾다'가 허비한다. 책장 구석에 책을 두고 다시 사는 경우도 있었다.


정리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치워야 공간이 생긴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어느 날 밤에 책상의 한쪽을 정리하다 보니 새벽 두 시가 되어 그만 잠들었다. 나는 '정리 공포'가 있는 편이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는 나쁜 습관을 지녔다. 음식 습관처럼 생활 습관은 어릴 때부터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정리의 달인인 친구에게 물으니 '버리는 것이 곧 정리'라고 한다. 무엇이든 잘 버리지 못해서 힘들다.


친구는 '안녕 박스'와 '공감 박스'를 만들어서 기부할 것이나 버릴 것을 안녕 박스에, 추억을 되새기고 간직하고 싶은 것을 공감 박스에 정리하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무엇을 하나 사 들고 집에 갈 때, '오늘은 무엇을 하나 정리할까' 생각한단다. 친구의 조언에 용기를 내어 볼까. 인간관계도, 물건도 '안녕'과 '공감'으로 나누어 천천히 시도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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