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배운다는 것
우리 부부가 임신 준비를 시작한 지 10개월째, 추석을 맞아 외조부모님과 영상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손주 이야기를 꺼내는 할아버지에게 나는 노력하고 있는데 아직 좋은 소식이 없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당시 결혼 8년 차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우리와 만나거나 전화할 때마다 꾸준히 손주 이야기를 하셨다. 내 대답에 할머니는 네가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그렇다고 안타까워하셨고, 할아버지는 늘 하시던 말씀을 하셨다.
"그러게 내가 그놈의 개 진작에 갖다 버리라고 하지 않았냐, 여자가 개를 옆구리에 끼워 놓으면 애가 안 생긴다고 하더라."
터무니없는 말이라 나는 늘 웃어넘겼다. 다소 위험한 내용임에도 할아버지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할아버지가 내게 상처를 주기 위한 의도가 없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둘 다 건강하고 금슬도 좋은데 아이가 몇 년째 없다는 것이 어른들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반려견의 존재가 아이의 자리를 차지할까 조바심이 나신 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사랑해 주셨던 만큼 내 아이도 사랑해 주실 것이기에 기다림이 애탈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도 이해된다. 그럼에도 내겐 씁쓸한 마음이 남는다.
애는 안 키우고 개만 키우는 요즘 부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브런치북의 프롤로그에서 나는 행인에게 무례함을 느꼈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사실 내게 그런 일들은 자주 일어난다. 우리는 초롱이와 함께 외출할 때 이동가방이나 개모차라고 부르는 유모차를 사용하는데, 편안하게 앉아있는 초롱이를 보며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들을 내뱉는다.
"개팔자가 상팔자네."
"아 뭐야, 사람인 줄 알았는데."
"무슨 개를 아기처럼 데리고 다니네."
이런 말들은 내게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은 채, 내 기분을 씁쓸하게 만든다. 사실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표현은 우리도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같은 말이라도 그 말에 담긴 마음이 다를 때가 있다. 이런 말들을 하는 표정과 말투에는 우리 가족을 향한 무시와 시기질투가 낮게 깔려있다. 개가 차지한 안락한 자리가 마치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듯 질투하고, 우리 가족을 보나 마나 한 한심한 유형이라고 정의하는 듯한 무시를. 그리고 그건 반려견과 함께하는 삶의 기쁨을 누려보지 못한 이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듯이 다정한 눈빛으로 초롱이를 바라보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런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어김없이 자신의 반려견과 함께 했던 따뜻한 사랑의 역사를 전해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따뜻한 감정은 집에 반려견이 있다고 반드시 느끼게 되는 게 아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초롱이를 데리고 나가기까지 2년간 초롱이와 함께 살았지만, 초롱이는 엄마에게 그저 책임져야 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우리 부부가 한국으로 돌아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 엄마는 은근슬쩍 손주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것 같다고 대답했고 그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자신이 초롱이를 다시 데려가면, 우리가 여유가 생겨서 아이를 가질 생각이 들 거라고 판단했는지 자신에게 초롱이를 넘기라고 여러 번 제안했다. 어느 날, 나는 진지하게 엄마를 붙잡고 이야기했다.
"엄마가 둘째를 낳고도 첫째인 나를 버리지 않았듯이, 내게 초롱이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는 그런 존재야. 초롱이는 내게 그냥 개가 아니라 가족이고 무엇보다 난 초롱이 없이 살 수 없어."
그 이후로 엄마는 초롱이를 데려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 진심이 엄마에게 닿았고, 엄마는 이제 초롱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엄마는 초롱이까지 포함해서 우리 가족이 3명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 엄마와 할아버지도 초롱이의 존재를 오해할 정도이니 곱지 않은 사회적인 시선은 이해 못 할 리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내가 결혼한 지 6년 반 만에 아이를 갖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반려견 초롱이 덕분이라는 것이다. 초롱이는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먼저 초롱이는 내게 희생의 긍정을 알려줬다. 20대의 나는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등의 타이틀에 내 이름이 잡아 먹히는 걸 경계하며 살았다. 그러던 내가 초롱이 언니, 초롱이 보호자 님으로 불리는 걸 좋아하게 됐다. 나에게 희생이란 나라는 정체성을 지우는 비자발적 행위였는데, 나는 초롱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며 기쁨을 알아버렸다.
때맞춰 밥그릇에 담아준 사료와 영양제를 싹싹 혀로 긁어먹는 초롱이를 보면 뿌듯하고 기쁘다. 시간을 들여 초롱이가 좋아할 만한 공원을 가고, 숲 길을 초롱이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서서 걸을 때 행복하다. 분리불안이 심한 초롱이를 혼자 두지 않기 위해 신경 쓸게 많지만, 초롱이가 내게 중력까지 맡겨버린 것처럼 털썩 기대 누울 때 나는 내가 초롱이의 보호자라는 타이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음으로 초롱이는 내게 사랑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려줬다. 나는 임신과 출산의 과정이 막연하게 두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부모가 된다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아직 훌륭하거나 완벽한 부모가 될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다. 초롱이도 잘 못 키우는데 아이를 어떻게 키운단 말인가.
초롱이에게 내가 최고의 보호자가 되지 못할 때 나는 내가 미웠다. 그런 마음이 날 무너뜨릴 때, 내 발치엔 항상 초롱이가 있었다. 그래도 난 언니가 좋다고 말하는 듯한 고요하고 여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봐줬다. 나는 때로 실수하고 초롱이를 힘들게 했지만, 최선을 다해 초롱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걸 알아차렸을 때 나는 안도했고, 어쩌면 내가 완벽한 부모는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부모는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초롱이는 내게 존재의 경이로움을 알려주었다. 살이 쪄봤자 고작 6kg의 개인 초롱이는 강하다. 자기 키의 몇 배를 뛰고,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코어 힘이 좋아서 가볍게 뒷발만 곡예하듯 들어 올리고,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절개 수술을 이겨내고 같은 자리에 새 살을 피워냈다. 작은 발로도 중력을 버티며 당당하게 선다. 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람보다 먼저 소리를 들으며, 촉촉한 코를 들썩거리며 작은 간식 한알을 구석에서 찾아낸다. 내 표정을 읽고, 마음을 같이 느낀다. 내가 기뻐하면 함께 기뻐하고, 울적하면 함께 예민해진다. 초롱아, 이름을 부르면 달려온다.
나는 이렇게 단순하고도 복잡한 작은 존재가 경이롭다. 나는 내게 눈을 맞춰오는 초롱이에게 종종 묻는다. 어쩌다 너라는 존재가 내 인생에 오게 되었는지를. 그런 선물 같은 행복이 내게 일어났다는 것이 감사할 때가 있다. 개 한 마리도 이렇게 큰 감동을 줄 수 있으니, 만약 내 인생에 아이라는 존재가 찾아온다면 그 신비와 감동을 기쁘게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때론 죽도록 때려치우고 싶은 행복이라도. 사랑은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상처와 회복을 반복하며 강해지는 일임을 나는 초롱이에게 배웠기 때문에.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