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시작되었다. 교사에게 3월은 중요하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생존경쟁에 내몰리는 시간이다. 더구나 한 학급을 책임지는 담임교사의 입장이 되면 3월만큼 중요한 시간이 또 있을까 싶다. 신입생이라면 정보가 없지만, 재학생인 경우 어떤 학생들이 모여 있느냐에 따라 반 분위기가 결정되기에 2월부터 학급 관리에 대한 틀을 짜고 계획을 세워 일 년 동안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말하자면 3월의 분위기가 일 년 농사를 좌우한다는 거다.
그해 3월 첫날,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한해가 어쩐지 순탄치 않을 거 같은 강력한 예감이 들었다. 34명의 남녀 혼합반 아이들은 순하고 착한 아이들은 적었고 따지기 좋아하고 공부는 뒷전인데다 무리를 지어 놀고 교실을 끼리끼리 모여 노는 교제의 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아침에 담임이 들어오는 그 시간까지 얼마나 시끄럽게 놀았는지 내가 들어가서도 열기가 가라앉지 않아 숨소리가 거칠었다. 아침부터 힘을 빼면 수업 시간엔 슈퍼맨 자세로 책상과 한 몸이 되기 일쑤다. 작년에 학교를 시끄럽게 하고 문제를 일으킨 남학생 두 명도 뒷자리에 있었고 여학생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화장품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교탁에 서 있는 교사를 팔짱만 끼지 않았다 뿐이지 아래로 내려다보며 입가에 히죽거리는 웃음이 가득한 아이들이 교실에 모여 있었다. 더군다나 2명이나 제시간에 오지 않아 출석부에 지각 체크를 해야 했다. 첫날부터 출석부에 출결 기록이 된다는 건 앞으로 그 반이 어찌 굴러갈지 알려주는 것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우리 반 아이들의 성향은 나와 맞지 않았다. 지각을 밥 먹듯 하는 아이가 속출하고 규칙은 지키지 않았다. 작은 일에도 우르르 몰려 함성을 지르고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하루 내 이어졌다. 인문계 고등학교임에도 공부엔 관심이 없어서 수업 시간엔 엎드려 자는 애들이 태반이었다. 우리 반에 대한 교과 교사들의 불만이 심했다. 아이들이 집중하지 않고 교사의 지시에 불응하며 불손한 데다 비아냥거리는 태도까지 보인다고.
이런 경우 학기 초에 제대로 잡지 않으면 일 년 내내 그 분위기가 그대로 가기 때문에 담임으로서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개학 전에 파악한 바로 우리 반 애 중에 공부에 관심이 있는 아이는 적었다. 전체 평균도 다른 반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편이었고 일단 아이들이 기가 센데다 부정적이었다. 불러서 조용히 타이르면 입을 삐죽거리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면 ‘왜 나만’이라는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거기엔 H의 영향이 컸다.
H는 체구가 그리 크지 않은 남학생인데 얼굴이 길고 다부진 인상에다 턱선이 뾰족하고 눈빛이 강했다. 침을 교실 아무 데나 퉤퉤 거리며 뱉어서 주의하라고 경고했더니 나중엔 가래까지 끌어모아 뱉었다. 그 아이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영향을 끼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반 남학생들은 H를 닮아갔다. 그의 불손한 행동과 제지하는 교사 사이의 실랑이를 아이들은 영웅담으로 읽었다. 규칙은 지키지 않는 학생을 지도하려는 선생을 자기들을 옭아매려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학교는 졸업장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부모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나오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공부도 뒷전이고 반칙과 편법이 판을 치는 우리 반 아이들을 앞에 두고 3월의 나는 매일 고민녀가 되었다. 오늘은 이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고 그다음 날엔 기다렸다는 듯 다른 문제가 터져 나와 우리 반은 공부도 못 하고 떠들고 말썽꾸러기가 많은 문제반으로 선생님들 사이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번 고착된 평가는 일 년을 가기 마련이다. 청소도 하지 않고 도망가거나 하더라도 슬렁거리고 다니다 담임이 있을 때만 하는 척을 하니 청소 시간에 임장 지도를 해도 교실은 다른 반보다 더러웠다. 휴지통엔 늘 쓰레기가 넘쳐났고 치워도 휴식 시간마다 아이들이 버린 과자 봉지들이 수북이 쌓여 벌레가 꼬였다.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다른 반보다 상담을 일찍 시작했다. 아이들은 성공보다 실패의 경험이 많아 공부해야 한다는 의지나 열의가 거의 없었다. 학교를 오는 이유는 친구를 만나 놀기 위해서라고 대부분 아이가 대답했다. 이런 아이들에게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해봤자 먹히지 않을 것 같아 5월 초에 열리는 체육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면 무한 리필 고기 뷔페를 쏘겠다고 공언했다. 순간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공부가 꼭 대수랴. 뭔가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런 순간을 경험해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그 경험은 반드시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으로 믿었다.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에서 목표를 향해 나가는 모습만이라도 보이기를 원했다. 아이들이 체육대회에 열의를 보일 때 슬쩍 학과 공부도 끼워 넣었다. 운동만 하지 말고 쉴 때 책도 읽으라고 꼬드겼다. 아이들의 잘못된 우상인 H와는 매일 노트를 교환했다. 학생들의 주요 고민인 진로, 여자친구, 학교, 공부 등등 쓰고 싶은 내용을 주제로 매일 한 바닥씩 써서 교환했다. 내가 먼저 처음 만난 H에 관해 쓰고 앞으로의 기대나 미래에 대해 쓰자, 자기도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계획하고 싶다는 제법 그럴듯한 답장이 왔다. 내가 써서 그에게 주면 다음 날 아침에 답장을 써서 내 자리에 가져다 놓고 내가 다시 쓰고 H가 가져다 놓는 식의 릴레이가 두 달 동안 이어졌다. 물론 매일 가져온 것은 아니다. 깜빡하고 쓰지 못한 경우도 자주 있었다. 공책을 며칠씩 가지고 있다가 성의 없이 답장을 써 온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가져오는 게 어디냐 싶어 칭찬을 해주고 자주 불러 상담했다. 편지의 내용은 친구 문제로부터 부모님과의 갈등, 공부하고 싶은 마음과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 청소년들의 고민이 담겨 있었고 비교적 솔직하게 적어와서 나는 학기 초 학생에 대해 가졌던 편견에 대해 반성하기도 했다. 내심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편지가 오가는 동안은 우리 반 아이들도 잠잠하고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체육대회 우승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찼다.
그 사이에 중간고사가 있었다. 물론 예상대로 꼴찌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른 목표가 있었다. 아이들은 나에게 자주 무한 리필 고기 뷔페에 대해 상기시켰고 먹기 위해 대망의 체육대회를 기다렸다. 아이들의 눈이 반짝일수록 나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이들에게 보상을 강조해 행동하게 하려는 나의 모습이 교육적이지 않다고 생각되었고 그들의 요구가 나에게 빚 독촉을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성취의 기쁨을 맛보는 게 아니라 보상이 걸려있는 일이니, 목숨을 걸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밀린 빚을 청구하는 것처럼 고기 먹는 일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보며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체육대회가 끝나고 기적처럼 우리 반이 우승했다. 약속대로 고기 뷔페를 갔지만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이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음료도 사달라, 노래방도 가고 싶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거금의 식사비를 지불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나왔다. 고작 저런 모습을 보자고 그동안을 견뎌왔던 것인가. 나는 아이들이 전혀 사랑스럽지 않았다. 사랑은커녕 나에게 들러붙을까 봐 떼어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물론 그동안 주춤했던 H의 무용담도 거기에 한몫했다.
체육대회 날, 운동장에서 휴대전화기를 주웠는데 주인에게 바로 돌려주지 않고 거래를 시도하다가 자기가 원하는 금액이 나올 것 같지 않자 휴대전화를 반으로 부러뜨려 운동장에 버렸다. 이 일로 학교가 시끄러웠으나 H는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두 달 가까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시도했던 나의 노력은 의미가 없이 H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배신감으로 몸이 떨렸다.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인간에게 두 얼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없이 공손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자기의 기분이 틀어지면 돌변하는 얼굴은 이전과는 판이하였다. 휴대폰 사건으로 선도위원회가 열리고 우리 반은 또다시 흔들리는 파도 위에 올라섰다. H의 어머니는 고작 그 일로 선도위원회가 열리도록 방치했다고 나를 몰아세웠다. H와 반 아이들의 일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장난이었는데, 담임이 그걸 선도위원회에 넘겨서 일을 크게 만들었다고. 나에게 힘주어 반항하고 수업 시간에 무단으로 학교 밖으로 나간 H는 일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해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제가 한 일이 너무 큰 잘못이어서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 아파트 옥상에 와 있습니다. 너무 죄송해서 여기서 뛰어내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습니다.”
문자를 다 보기도 전에 나는 그의 속내를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이제 옥상에서 너무나 죄송해 죽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고 있는 아이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그 일이 원인이 되어 H는 자퇴 후 다른 학교로 옮겨 갔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교실에 들어가면 나 혼자 유리 벽 속에 갇혀 아이들이 보내는 화살을 다 맞고 있는 듯했다. 나의 말은 아이들 마음에 다가서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며 벽에 가서 부딪혀 떨어지곤 했다. 저런 애들을 위해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노력한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학교를 그만두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는 더 이상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 그들을 사랑하지도 않았다. 나에겐 미움과 증오가, 배신감과 자괴감이 가득했다. 퇴근 후 집에 와 누우면 눈물이 흘렀다. 하도 가족들에게 애들 이야기를 하고 하소연하니 제발 애들 생각을 떨쳐버리라는 핀잔을 들었다. 그냥 놔두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고등학교 2학년이면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나이이니 고민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가족들이 충고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모르는 게 있다. 교사는 아이들과 있을 때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아이들이 없는데 교사가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아이들과 깊게 소통하는 교사야말로 정말 행복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나는 불행한 교사였다.
악몽 같은 1학기를 보내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자유롭게 방학을 보내고 온 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이 뛰놀았다. 쉬는 시간에 우리 반 여학생들이 무단으로 담을 넘어 인근 가게에 가서 과자를 사서 오다 걸려 복도에서 벌서고 있었다. 나를 보고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수능 전날, 3학년이 아니어서 학교에 가지 않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술집에서 14명이 술을 먹다 경찰에게 걸렸다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기도 했다. 자기 부모에게 전화하면 혼날 게 뻔하니 만만한 담임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것도 괘씸했다. 수능 감독관 연수에서 돌아와 피곤한 몸을 씻고 내일 감독을 해야 하니 일찍 자려던 나의 계획은 아이들을 직접 와서 데려가라는 경찰의 전화에 어그러졌다. 수능 고사장이어서 문이 닫힌 학교 앞에 아이들을 모으고 부모님들이 와서 데려갈 때까지 있었다. 겨울밤은 깊어가고 날은 추웠다. 반장이 포함된 14명의 아이는 부모가 차례대로 데려갔다. 마트에서 일한다는 한 아이의 엄마는 결국 밤 11시가 넘어서야 왔다.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지쳐 차 안에서 언 몸을 녹이며 저런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했다. 1학기만큼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을 이미 반쯤 포기한 것일까? 2학기에 와서 나는 마음을 많이 내려놓았다. 아이들의 미래나 진로에 대해 더 이상 마음 쓰지 않았다. ‘부모도 못 하는 것을 교사가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에 의지하여 자신을 위로했다. 교실은 난리 블루스였지만 나는 종례를 가장 일찍 끝내는 교사였고 아침에도 기계적으로 지시사항만을 전달해 주었다. 아이들과 나는 그만큼 멀어졌다.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어서어서 이 지겨운 학년이, 아이들과 이별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했다.
마침내 종업식의 날이 왔다. 정말 나와 하나도 맞지 않는 30여 명의 아이와 부대끼는 동안 시간은 흘렀다. 미련 없이 그들과 헤어졌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은퇴 후에 눈이 많이 내린 겨울날,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걸었다. 앞만 바라보고 똑바로 걸었는데 뒤돌아보니 발자국이 어지러웠다. 다시 마음을 다지고 똑바로 걸었다. 그래도 마음만큼 바르지 않았다. 모든 일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지던 종업식 날이 떠올랐다. 날씨만큼 냉랭했던 분위기가 되살아나며 무언가 내 마음에서 툭, 떨어졌다.
나는, 그때 왜 그렇게 급했던 걸까. 왜 아이들을 기다려 주지 못했을까. 저마다 보폭과 속도가 다르고 생각이 다른 아이들을 모아놓고 왜 내가 만든 틀 안으로 들어오게만 했던 것일까. 따라와야 한다고 왜 나만 서둘러 앞서 걸어갔을까. 그 길이 과연 옳았던 것일까? 그게 최선이었을까.
3월 안에 교실을 재정비하고 아이들을 장악한 유능 교사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걸까.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자유자재로 내 손끝에서 움직이게 하고픈 마음이 강했던 걸까. 단시간 안에 문제반을 새롭게 바꾸는 기적의 아이콘이 되고 싶었던 걸까. 그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입도 아니고 어느새 중견의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아직도 애들에게 휘둘린다는 말을 듣는 게 싫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3월 한 달 사이에 모든 것을 완성하려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떠드는 아이건 문제가 있는 아이건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 주었을 것이다. 나는 옳다고 말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내 존재 자체가 폭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급하게 완성품을 보려 하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부끄러움을 느끼다니. 적절한 시기에 그것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사이좋게 그 학년을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
마음과 다르게 내 발길이 자꾸 눈길에서 흐트러진다.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며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