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몸'을 떠올려볼까요?
‘건강한 몸’을 한번 떠올려볼까요? 어떤 몸이 머릿속에 그려지나요?
이번에는 ‘아픈 몸’을 한번 떠올려볼까요? 어떤 몸이 머릿속에 그려지나요?
이 둘은 차이가 있나요? 차이가 있다면 어떤 것들인가요?
그렇다면 내 몸은 건강한가요, 아픈가요?
건강하게 보이나요, 아니면 아파 보이나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위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면서 어떤 이미지들이 그려지는데 좀 부끄러워지기도 하네요. 오늘은 그 부끄러움에 대한 생각의 일부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해 스테로이드를 장기간 복용하면서 몸의 기운이 상승하고 식욕이 늘어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몸무게가 늘었습니다. 체중이 늘어 스트레스인 분들은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테지만 저에게는 자꾸만 줄어드는 체중이 큰 고민이었습니다. 아프고 나서야 그것이 기저질환 때문일 거라는 합당한(?) 이유를 알게 되어 안심이 되었지만 그전까지 체중감소의 책임은 모두 저에게로 향했습니다. 식습관이나 스트레스 관리 등 모두 제가 잘 못한 것 같았어요. 먹어도 빠지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무서워지더라고요. 그런데 약의 작용으로 식욕이 높아지고 식성도 좋아져서 먹는 양도 늘었지요. 분명 난 아픈데 살이 찌니 덩달아 얼굴이 좋아 보이는 겁니다. 마치 건강한 사람처럼 말이에요.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아프다고 해서 걱정 많이 했는데,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민망한 마음에 처음에는 그냥 웃고 지나쳤는데요, 나중에는 약간 항변하듯 말했습니다. 아니라고, 나는 아픈 사람이라고. ‘아픈데 보기 좋아 보인’ 다는 말에 꽤 복잡해집니다. 아프지 않게 보여서 기분이 좋긴 한데 그렇다고 나의 아픔이 과소평가되는 것은 싫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생각하는 ‘아픈 사람’의 모습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아파 보이면 좋지 않은 건지, 왜 나는 아파 보이고 싶지 않은 건지 말입니다. 사실 ‘병약미’라는 말도 있잖아요. 하지만 ‘아픈’ 상태가 아름다워 보이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실제로는 아프지 않다는 조건 말이지요.
다른 이야기를 해볼게요. 올해부터 조금씩 근력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운동과 관련된 영상이나 정보를 많이 찾게 됩니다. 근력운동을 지속하려는 이유는 만약 질병이 악화되더라도 잘 아프고 싶은 몸의 상태가 되길 바라는 마음과 또 하나는 무릎 통증 때문입니다. 통증이 어떻게 하면 감소할 수 있는지, 자세가 바른 지, 올바르게 근육을 쓰고 있는지 등을 찾아봅니다. 그러다 보면 운동을 꾸준히 해서 단련된 근육질의 몸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요, 전문적으로 운동을 하고 몸의 움직임을 공부하고 고민하는 분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모습이 무척 멋지게 보이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 몸들이 아픔을 모르는 몸들 같아서 나도 모르게 저런 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마치 이상적인 몸인 것 같다는 착각, 실제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말이지요.
아프면서 몸에 대한 다양한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바라는 몸'이 생긴 것도 아프고 나서였습니다. 저는 지금껏 제 몸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살아왔는데, 몸이 언제나 그대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몸이 다를 수도 있구나, 늘 같은 기준과 상태로 지속될 수 없을 수 있겠구나를 아픔을 경험하면서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면서 역설적이게도 저는 현재의 몸이 아닌 다른 몸을 상상하게 되었어요. 잘 아플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도 건강하게 보이고 싶은 몸에 대한 열망이 피어오르더라고요. 아프거나 덜 아프거나의 상태가 몸의 형태로 반드시 보이는 것이 아님에도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상적인 몸의 이미지는 꽤 고정적이었습니다. 이 솔직한 열망에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장애와 질병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사유하는 수전 웬델은 ‘정상성의 훈육’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이상적인 몸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만, 이상형은 언제나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상형에 가까운 몸을 만들기 위해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로 다루어 몸이 대상화되는 것, 이를 위해 기꺼이 소비를 촉진하는 문화를 경계합니다. 운동을 하는 것이 몸을 대상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이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추구하고 선호되는 몸의 형태가 있고 그것을 위해 운동이나 다이어트 등 정도를 지나친 방법들이 많이 소비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근육질의 몸이지만 질병이 있을 수 있고 소위 약해 보이는 몸이지만 큰 질병 없이 살아가는 몸들도 있습니다. 또한 질병과 함께 하루하루 잘 살아가는 몸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언제나 변합니다. 매 순간 달라지는 몸과 몸의 상태일 텐데, 왜 ‘바라는 몸’의 형태는 이리도 협소할까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텐데, 저는 종종 보이는 것만 보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몸들이 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그리고 그런 사회를 함께 만들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저는 지금껏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것을 열망하고, 협소하게 구축된 ‘이상적인 몸’을 긍정적으로 상상하고 있더라고요. 아프면, 잘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요즘 문득문득 드는 몸의 단상을 조금 더 이해하고 정리하고 싶어서 글을 썼습니다. 아프지 않을 것만 같은 몸을 바라는 것이 단지 아프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아픈 몸은 대부분 부정적이고 환대받지 못하는 몸으로 인식되어온 뿌리 깊은 문화와 구조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이를 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는 인식은 매번 연습이 필요한 것 같아요. 더 나아가 왜 건강한 몸이 기준이 되었고, 아픈 몸은 이탈한 존재로 머물도록 하는지에 대한 사유도 빠져서는 안 되겠지요.
사실 글을 시작하면서 던진 질문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몸과 아픈 몸이 따로 나누어져 있지도 않을뿐더러 고정적으로 지속되는 정체성도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제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위 질문들을 꽤나 자연스럽게, 고정적으로 소비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도 듭니다.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_
Comb my hair "Kings of Conven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