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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May 26. 2021

꼭 건강해야 하나요?

사소한 저항의 언동 2

작년부터 인지하기 시작했으니 그리 오래된 생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생각이 덜 소화되었을 수도 있겠어요. 그럼에도 언젠가는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짐, 꽤 의미심장한 단어처럼 느껴지네요. ‘저항’의 언동이 되려면 이 정도쯤은 해야겠지요.      


새해를 맞이하거나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할 때 흔히 덕담을 주고받으며 마지막은 의례 ‘건강하세요.’라고 합니다. 코로나 19 상황이 장기화되자 서로의 건강을 챙기는 안부는 더욱 중요해졌지요.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기에 상대방을 위하는 말임을 의심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건강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면 악담을 퍼붓는 것처럼 불쾌감이 높아질 겁니다. 세상 그 누가 건강하지 말 것을 바랄 수 있을까요?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지인이 “하늬, 꼭 건강해야 돼.”라고 다정하게 말하는데 그 말이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겁니다. 그 당시 저는 유육종증이 완치될 수 없는 질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몸에 퍼져 있는 염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건강해지라고 하니, 마치 이룰 수 없는 무언가를 꼭 달성해야만 할 것 같아 아찔해졌습니다. 계속 아픈 상태로 살아갈 것 같은데, 어떡하지? 무엇을 더 해야 하는 건가 싶었어요.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과 마주하는 것도 버거운데 건강까지 하라고 하니 모든 것의 결과는 나하기 달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인은 제 마음을 더 무겁게 하려고 건넨 말이 분명 아니었을 겁니다. 아프니까 낫기를 바랐고 아프지 않던 때로 돌아가길 염원하는 다정하고도 감사한 의미였을 거예요. 누군가 아프다면 저 역시 말했겠지요, 건강하라고. 아픔은 반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아픈 사람에게 건강하라는 말 이외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막막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픔이 한시적이고 예외적이 아닌 상태라면, 의지로 이겨내거나 극복하는 등의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건강하세요.’라는 말은 잔인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에서 기획한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는 그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 여겨져 왔던 건강한 몸, 독립적 개인, 개인의 소유물로서의 권리라는 관념들을 비판적으로 되짚어보기를(55쪽) 제안합니다.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몸이 말을 안 듣는다”라는 표현은 우리 문화와 우리 자신의 삶 전체가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신화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반증(같은 쪽)한다고 말합니다. 건강을 일시적인 상태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으로 믿는 것, 그 신화가 어떻게 몸을 통제하고 효율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지에 대한 사유와 분석도 더하지요.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지금껏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거든요. 아마도 그동안 저에게 아픔이란 잠시 머물다 어느 정도 회복되면 사라지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몸이 말을 안 듣는다’는 표현처럼 ‘건강만 해라’ 또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표현을 다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이 표현들을 뒤집어 생각하면, 건강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건강하지 않으면요? 정말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되는 건가요? 그럼 건강을 잃은 아픈 사람들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건가요? 아프고 취약하고 나약한 몸의 상태가 되는 것이 얼마나 환영받지 못하는 상태였던가를, 어쩌면 피하고 거부하고 싶은 몸의 상태였던가를 어렴풋이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건강’이란 정말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지금껏 제가 인식해 왔던 건강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간단하게 건강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몸이나 정신에 아무 탈이 없이 튼튼함’이라고 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었던 것 같아요. 아프지 않고 아무런 탈이 없는 상태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했습니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몸이 기준이 되고 아프고 ‘비정상적’인 몸은 그 기준에서 이탈한 상태, 다시 정상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상태라고요. 그랬기에 건강하고 싶은 염원은 클 수밖에 없었어요. 정상궤도에 들어간다는 것은, 저에게, 주 5일 근무를 아무렇지 않게 수행할 수 있다는 것,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고도 다음 날이면 멀쩡하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 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때로는 무시하며 친구들을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다는 것, 병원에 자주 가지 않고 몸의 손상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정상궤도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이미 이탈한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면서, ‘건강하세요.’라고 말이 가리키는 곳의 세계가 굉장히 제한적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설령 모두가 부정적인 몸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거나 갖게 될 수도 있다고 해도, ‘정상적인’ 몸에 대한 문화적인 개념이 젊고, 건강하고, 힘이 넘치고, 통증이 없고, 몸의 모든 부분을 갖추고 있고, 최대의 범위로 우아한 움직임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부정적인 몸에 대한 경험을 마주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험은 장애와 병을 가진 주변화된 사람들,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 ‘우리’가 아닌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다. (거부당한 몸, 177쪽, 수전 웬델)       


장애와 질병의 몸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수전 웬델은 인간의 몸이 실제로 매우 다양하지만 현대의 상업화된 문화는 이런 사실을 반영하지 않고 몸을 ‘이상화’한다고 지적합니다. 이상적인 몸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만, 이상형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거지요. 특정한 몸을 이상화함으로써 몸을 대상화하는 것, 다른 몸들이 거부당하고 주변화되고 더 나아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상성의 훈육’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는 여성성에 대한 훈육처럼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강요될 뿐 아니라 내면화되기도 하며, 정상성의 기준에 근접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한 자각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상성의 기준에 부합하는 우리의 능력이 어떤 식으로 위협받기 전에는 이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거부당한 몸, 172쪽)이라고 덧붙입니다. 예를 들어, 질병이 찾아와 일상적으로 수행하던 능력이 제한되는 경험 말입니다.      


건강한 몸을 염원했던 저는 어쩌면 ‘정상적인 기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계속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몸들이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 다른 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배제한 채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건강에 대해 끊임없이 요구하고 열망하는 개인의 욕구와 문화는 그렇지 않은 몸들에게 얼마나 관대하지 못한 걸까요. 건강한 몸에 맞추어 움직이는 속도, 방향, 문화, 시설 등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몸들을 탈락시키고 있습니다. 건강이 정체성이 되는 사회에서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잘’ 산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항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저는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대체할 말을 찾아야겠지요. 그래서 저는 건강하세요, 라는 말 대신 ‘몸과 마음을 잘 챙기세요.’ 또는 ‘몸과 마음 토닥이는 나날 보내세요.’ 라거나 ‘무탈한 하루 보내세요.’ 등의 말을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이것저것 시도하며 써 봅니다. 이거다! 하는 말을 아직 찾지 못했지만 찾아가면서 계속 시도해 보려고요.      


참 어렵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건강하라고 안부를 전하는 그 마음은 참으로 따뜻하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 깊숙한 어딘가에는 아프고 싶지 않다는 열망도 큽니다. 물론 ‘아픈 상태’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요. 하지만 이 고마운 서로의 마음과 저의 바람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지점들은 무엇일지 곱씹게 되는 요즘입니다. 또한 건강해야만 잘 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에 대해서도 섬세하게 감각해 보고 싶습니다. 아픔이나 질병, 손상이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문화, 우리를 겹겹이 둘러싼 구조가 ‘문제’로 인식했기에 문제로 받아들였던 것을 알아차리면서요.       


저의 고민은 끝이 나지도, 모두 정리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애정하는 누군가의 안녕을 염려하는 안부가 ‘건강’으로만 귀결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건강하지 않아도, 아프면서도 잘 살아가고 있는, 살아갈 존재들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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