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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머핀 Apr 06. 2024

지루함의 축복

내가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감정 중의 하나는 지루함이다.


무료함, 지겨움과 같은 류의 감정은 보통 똑같은 일상이 반복될 때 찾아온다. 같은 교통수단으로 같은 길을 따라 출근을 하고, 같은 시간에 자리에 앉아 매일 반복되는 업무를 하고, 저녁에 요리해 먹는 식사 메뉴도 매일이 거기서 거기.


기계적인 삶을 살다 보면 처음에는 아무리 바라던 일상이었다 해도 어느새 회색빛처럼 무뎌진다. 멋진 인생은 뭔가 화려한 활동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만 같은데, 매 주가 비슷비슷한 나의 인생은 그냥저냥 크게 즐거운 일도, 크게 나쁜 일도 없이 살아가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몇 년 전 이 지루함을 간절히 바라던 내가 떠올랐다.




MBA를 졸업한 여름, 학교 근처에서 살던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와 2시간 거리에 있는 대도시로 이사 중이었다.


이사를 마무리하고 새 집에 앉아 짐 정리를 하다 보니 맙소사 - 그때 EAD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허가증 같은 것)가 우편으로 도착할 즈음이었는데, 이사에 몰두하다 보니 주소 이전을 해 놓는다는 걸 깜빡한 것이었다.

컴퓨터를 켜서 주소를 당장 바꿔보려고 했지만, 잠깐 정신없었던 그 일주일 사이에 이미 EAD 카드가 이전 주소로 배달이 된 상태였다. 그러니 주소를 바꿔봤자 소용이 없었다.


이 카드가 왜 중요하냐면, 물리적인 카드를 실제로 소지해야만 미국에 체류도 하고 일도 할 수 있어서 그렇다. 복사본이라도 괜찮지만 카드를 받은 적이 없으니 사본은 당연히 없었고 말이다. 그 당시 막 시작했던 인턴 자리도 원칙은 카드를 먼저 증빙으로 제시해야만 일 할 수 있었던 것을, 인사팀의 마음씨 좋은 직원분이 그나마 며칠 기한을 준 것이었다. 심지어 이 카드가 없으면 몇 달 후에는 불법체류가 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이걸 찾을까 고민하다가, 이전 아파트 중개인에게 그 집에 이미 들어가 있는 우편물만 어떻게 좀 볼 수 있는 방법이 없겠냐고 이메일을 보냈다. 중개인의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이제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가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집의 우편함을 여는 건 주거 침입의 문제가 되니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ㅠㅠ)


이유는 너무나 타당하지만, 나 이거 없으면 여기서 쫓겨난다고 애원하는 글을 구구절절 장문으로 써서 보냈다. 원래도 무미건조했던 중개인에게선 답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되니, 나는 살던 도시로 다시 돌아가서 우체국을 전부 뒤지기로 했다.

산더미 같은 메일 속 오로지 내 것을 찾기 위해


전날 밤 도착해 친구네 집 남은 매트리스에서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난 후, 살던 아파트 근처의 두 개 우체국을 아침 9시가 되자마자 들어갔다. 무작정 내 이름 앞으로 온 우편 중에 뭐 중요해 보이는 것 없냐고 아주머니를 붙잡고 간절히 물었다.


푸근한 스타일의 우체국 흑인 아주머니는 나의 근심을 공감해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내 이름으로 되어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높은 확률로 살던 그 집 우편함에 들어가 있을 테니 거기서 찾아야 한다고.


우체국 방문을 죄다 실패하고 난 오후에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고작 이 카드 하나 없어서 인턴도 하나 할 수 없는데 (심지어 무급), 게다가 체류문제도 생기니 그러면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을 판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건 왜 하필 이사할 때 도착해서 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 건지. 나는 또 왜 미리미리 그런 걸 챙기지 못하고 고생을 사서 하고 있을까?


내가 바란 건 복권당첨도 아니고 그저 평범하게 돈 벌며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 크지 않은 바람이라 생각했는데 겨우 우편물 하나 잃어버려서 어이없게 나가야 할 나를 생각하니 스스로가 불쌍하기 짝이 없었다.


'제발 진짜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도 좀 왔으면 좋겠다', 하며 길에 주저앉아 간절히 기도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며 살던 아파트를 향했다. 아파트 1층 관리사무실에 앉아있는 아는 얼굴, 다이앤을 보자마자 통곡을 했다. 이거 없으면 미국에서 쫓겨난다고 흐엏으헝하는 나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지금 사는 사람의 정보는 보안상 알려줄 수 없지만, 그 사람에게 내가 이메일로 물어는 볼게. 이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하고는 다이앤은 이메일 창을 켜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해주면 너무 고맙지!!" 외치고 옆에 나란히 서서 쓰는 내용을 보고 있는데, 바로 옆 모니터에 띄워놓은 현재 세입자의 핸드폰 번호가 저 멀리 내 눈에 들어왔다.


생존을 향한 강렬한 반응이었나? 나는 다이앤 모르게 빛의 속도로 그 번호를 외웠다. 그리고는 관리사무실을 나와 잽싸게 그리로 문자를 보냈다. 나 이전에 거기 살던 사람인데 우편물 좀 보면 안 되겠냐고. 앞 뒤 사정도 모르고 불쑥 연락을 받은 새로운 세입자가 답을 할 리는 없겠지만 일단 들이대야 했다.*




그때를 다시 떠올리고 보니, 지루함의 다른 의미는 무탈함이었다. 큰 사고 없이, 불행 없이 무사히 하루가 지나갔다는 것이다. 몇 년 전 내가 그리도 바라던 지루한 일상이 오늘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이번주의 소원: 지루함의 축복이 모두에게 있기를!



*놀랍게도 그 문자에 새로운 세입자 미국 청년은 흔쾌히 답을 해 주었다. 아파트 앞에서 잠깐 만나준다고 하였다. 약속한 시간에 그가 아파트 1층으로 내려왔다.


"중요한 것 있을까 봐 혹시나 해서 안 버리고 가지고 있었어. 그 안에 필요한 게 있기를 바랄게!"


하면서 고무줄로 묶어놓은, 지난 한 달간 내 이름으로 온 편지봉투를 다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EAD를 찾았다. 지금 이렇게 여기서 잘 살고 있는 건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세심한 배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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