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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곰곰 Aug 13. 2018

#4. 아빠 말 안 듣기

어쩌면 내가 심리적으로 독립해 만든 첫 결정

우리가 우리의 결혼식을 만든다는 설렘과 일을 진행해야하는 스트레스 사이에서 헤매는 동안 완전히 잊은 것이 있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결혼식은 대체로 부모의 행사라는 것, 모든 사람이 이 결혼식을 우리 둘만의 행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나와 아빠는 생각보다 서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나는 아빠가 딸의 결혼식에서 딸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것에 많은 의의를 부여할 것이라 생각도 못했고 (성급하게도 - 세상사람들이 다들 그 전통을 싫어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아빠는 내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지 짐작도 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 보다 당신이 생각하시는 최선을 내게 준 결과일지도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엄마에게 전달했던 모든 것들이 아빠에겐 전혀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긴 여행중이던 아빠를 결혼식 준비 디테일로 방해하고 싶지 않던 엄마와 나의 과도한 배려가 낳은 최악의 결과. 상견례 이후 거의 처음으로 우리 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아빠는 우리가 정한 아주 사소한 디테일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많은 것들이 아빠와 의논 없이 결정되었다는 데에 특히 노발대발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이런저런 계획을 전달했던 나로선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마주친 격한 반대는 결혼박람회의 사소한 불쾌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를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나를 지지해주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내 친아빠고 가족인데! 판을 엎어버릴 정도의 반대를 맞닥뜨리다니.

의욕이 증발하고 힘이 죽죽 빠졌다. 끝까지 이 기획을 추진하기 너무 지칠 것 같아 애인을 만나 하소연 겸 의논을 했다. 우리 하루뿐인 결혼식으로 객기부리지 말고 그냥 남들 하는 대로 할까. 결혼식에 왜 이만큼 수고를 들여야 하는 지 모르겠어.

-후회하지 않겠어?

여태까지 내 의견이라면 다 찬성하던 애인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당연히 후회하겠지. 결혼하는 날이 하나도 즐겁지 않을거야.
그럼 지금 결정하지 말고 가만히 둬 보자. 지금은 결정하기 좋은 타이밍이 아니야.


고맙기도 하지, 애인의 말은 내게, 완전히 고장난 컴퓨터를 무사히 복원할 때, 또는 작업중인 파일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어디엔가 임시 파일이 무사히 남아있을 때의 안도감 비슷한 것을 주었다. 그의 다독임을 들으니 그제야 기억이 났다. 내가 얼마나 보통의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았는지, 축하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결혼식에 가도 그 전통들에 두드레기가 나는 기분이었다는 걸.

 하지만 아빠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결혼식은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준다. 결혼식에 초대할 정도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가 의도한 바가 정확히 전달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비용도 많이 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결혼식은 내 돈으로 하는 결혼식이 아니었다. 나는 ‘독립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우리 의견을 관철하는 것은 나로선 여간 뻔뻔한 행동이 아니었다.

염치를 지킬 것이냐, 내가 싫어하는 걸 피할 것이냐.
나는 후자를 택했다.

내가 그만큼 뭔가를 싫어한다는 정확한 진단에 따른 결과였다.

이 뻔뻔함은 내 첫 번째 독립이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독립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누군가는 나를 뻔뻔하고 몰염치한 사람으로 여길 테지만, 나는 독립의 단 하나의 모양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의 강한 의견을 충분히 듣고 숙고했음에도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이롭겠다 판단하는 고단한 과정이 심리적 독립이 아니라면 뭘까. 게다가 내 평소 생각을 나보다도 더 잘 기억해주는 동반자와 함께라면?

내 인생의 짝꿍은 내 애인이지 부모가 아니다.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다가 신랑의 손을 잡는 식순에 담겼을지 모르는 이 의미를, 우리는 이 식순을 빼는 갈등과정에서 깨달았고 실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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