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절벽에서 떠밀 필요는 없다
아니라면 큰일이다
'아니면 말고.'
박찬욱 감독의 가훈으로 잘 알려진 말이다. 딸이 초등학교 숙제로 가훈을 알려달라고 하자, 즉석에서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세상에는 의지만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 참 많고, 최선을 다해보고도 안 되면 좌절하는 대신 이렇게 털어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번의 흥행 참패와 생계를 위한 다양한 부업(?)을 거쳐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이기에 더 와닿는다. 될 사람은 된다.
그는 흥행 감독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내공이 가장 두터운 영화 평론가였고, 주요 언론에 기고하는 칼럼니스트였다. 초기작이 연달아 실패한 후 가졌던 공백기에는 생계를 위해 영화 평론집을 내기도 하고, 심지어 비디오가게를 운영하며 단편 영화를 찍기도 했다. 실력을 통해서든 자신을 낮춰서든,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예술적 시도를 지속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아니면 말고'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박찬욱이 아니다. 소중한 자산과 안정적인 직장 등 모든 것을 걸고 내 일에 베팅하기 전에, 한 번 생각해보자. 만약 생각했던 결과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아니면 말 수' 있을까.
좌절은 좌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물론 이겨낼 수 있는 좌절은 언제든 유익하다. 우리는 좌절을 통해 성장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개인적인 성장이 현실의 즉각적인 개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당장 우리가 대책 없이 망했을 때를 상상해보면 그렇다. 깨달음만 얻은 백수가 될 수도 있고, 소중한 사람들을 놓칠 수도 있다. 자칫하면 몇 년의 시간이나 건강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의 도전은 지속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아니라면 큰일이다. 위대한 창업자나 예술가처럼, 자신을 절벽에서 떠밀지는 말자.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을 수도 있는 법이다. (커버이미지는 박찬욱 감독을 부활시킨 공동경비구역이다.)
퇴사가 목표인 당신에게
코로나19를 거치며 전세계적인 대퇴사 시대가 도래했다. 이른바 MZ세대를 주축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기조는 일터에서, 관계에서, 라이프스타일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정해진 시간 동안 주어진 일만 하겠다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 의역하자면 '마음만 퇴사'가 더 맞을 수 있겠다)'라든지, 회사 밖에서도 다양한 일을 하는 'N잡', 본업의 연장선이지만 나만을 위한 프로젝트를 하는 '사이드 프로젝트'도 동일한 맥락에서 매력적인 개념이다.
그러다보니 언제부터인가 직장은 내 꿈을 방해하는 장애물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내 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퇴사가 멋지고 유능한 것이며, 진정으로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관점이 통념이 된 것 같다. 어쩌면 맞는 말일 수 있다. 나도 그랬으니까. 대부분의 회사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틀에 박혀있으며, 무엇보다 더이상 직원을 평생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선 아래 두 지인의 사례를 들어보자.
사례1. 지인 H의 경우
H는 건실한 대기업에 다니는 대리이다. 중공업답게 엄격하고 보수적인 분위기는 물론, 8시 출근이 당연시되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워라벨에 큰 불만은 없지만, 가끔 위에서 압박이 내려올 때면 소위 말하는 보여주기식 업무를 위해 전 부서가 불필요한 야근을 한다. 주말에 H를 만나 카페에서 얘기하고 있으면 종종 책상 위에 올려둔 그의 휴대폰에 'OO팀장님'의 카톡이 나타난다. 한 두 번 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 밥을 먹는 도중에 전화를 받아야하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회사에서는 모르지만, H가 자기 일을 통해 버는 돈은 월급의 2~3배가 된지 오래다. 그는 퇴근과 동시에 본인의 사무실로 출근해 자신이 고용한 직원과 합류한다. 평일에는 잠을 3~4시간만 자고, 주말에는 14시간씩 뻗어있는 통에 만나기 번거롭다. 그런 그가 퇴사를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퇴사를 하면 이렇게 효율적으로 살 자신이 없어서'다. 출퇴근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다. H는 자기관리에 능한 사람이지만, 현대 기업이 수백 년 간 최적화를 통해 만들어낸 시스템이 얼마나 사람을 체계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수익모델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의심한다.
사례2. 지인 S의 경우
자유분방한 S는 외국계 IT기업에 다니고 있다. 업의 특성상 풀 재택에 딱히 출퇴근시간도 정해져있지 않고, 본인이 약속한 목표만 잘 완수하면 된다.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운동과 자기 일(1잡)을 한다. 점심 즈음에 출근해서 몇 시간 동안 회사 일(2잡)을 하고, 저녁에는 투자와 관련된 공부와 실전(3잡)을 뛴다. 그럼에도 만족스럽지 못한지 만날 때마다 함께 스터디를 하자고 성화를 부린다. 현재 본업으로 하고 있는 일에 전혀 보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S도 N잡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고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퇴사할 생각은 없어보인다. 지금의 방식이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회사를 그만두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외부 사람들에게 본업으로 평가받고 싶어하는 듯하다. 그게 미래를 위한 네트위킹이나, 앞으로 하고 싶은 창업에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H와 S가 퇴사를 하지 않는 이유는 직장이 편하거나, 회사일이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다. 회사를 다니고 있음에도 충분히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퇴사를 한다고 하루에 주어진 24시간이 더 늘어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아직 자신이 꿈꾸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준비가 안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퇴사를 하면 한 두 번의 실패로도 그 도전이 끝날 수 있으니까, 그들은 망해도 되기 위해서 돈을 번다.
아무리 회사가 싫어도, 결코 퇴사 자체가 우리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퇴사를 '내 일'을 시작하기 위한 동기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퇴사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꿈꾸는 일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실패를 만드는 법
호기롭게 퇴사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토록 신나게 일을 벌리지 못했을 것이다. 창업도 마찬가지다. 그 경험이 없었다면 실력으로나 인격으로나 지금의 반의 반만큼도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재취업도 그렇다. 감사하게도 경력에 비해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고, 나에게 필요한 역량을 부지런히 채우고 있는 중이다.
가장 아쉬운 건, 도전과 실패를 지속가능하게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업을 정리하자, 다음 선택을 하기 위해 중요한 몇 가지 조건과 단서가 빠져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만약 당신이 '내 일'에 큰 베팅을 앞두고 있거나 그 일이 실패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아래 체크리스트를 눈여겨봤으면 좋겠다.
1) 대비책에 대한 검토
→ 이 일에 실패했을 때, 살아남을 방법이 있는가?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실패 이후의 생계에 대해 아무런 대비책이 없었다는 점이다. 털끝만큼도 망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실패는 현실이었고, 나는 차분히 다음 플랜을 세우는 대신 당장 눈앞에 다가온 생계를 먼저 걱정해야 했다.
안정적인 수입원이나, 언제든 본업으로 복귀할 전문성이 있다면 좋겠지만 이는 소수의 경우이다. 이처럼 확실한 대비책은 아니더라도, 대략 어떤 선택지가 있을지 미리 고민해둔다면 심리적인 압박감은 덜할 것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이나 개인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면 당신은 이미 다양한 경험을 해봤을 확률이 높다. 프리랜서나 과외, 단순한 파트타임이라도 좋다. 보다 익숙한 일을 하면서 숨고르기에 들어갈 수도, '내 일'을 하면서 얻은 부가적인 경험으로 다른 접근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 흥행 참패 이후의 박찬욱 감독처럼,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그의 경우 영화산업) 주변에 머무르며 자신을 더 날카롭게 다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2) 방향성에 대한 고민
→ 이번 실패와 관계없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이 있는가?
재창업 vs 재취업 vs 프리랜서(용병). 사업을 정리하면서 고민했던 방향성들이다. 창업도 해봤고 취업도 해봤으니 결정하기 쉬울 법도 한데, 전혀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생계부터 해결하자니 방향성이 마음에 걸리고, 방향성을 고민하자니 그 상황에서 사치인 것 같았다.
일단 방향성이 정해지면 많은 부분이 단순해진다. 재창업을 결정했다면 아이템 선정, 자금 마련, 사업계획을 세우면 된다. 재취업을 결정했다면 이력서와 경력기술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면 된다. 어느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생계의 압박을 견디면서 먼 미래의 방향성까지 고민해야 하는 골치아픈 상황은 피할 수 있다. 아직 여유가 있을 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실패하더라도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미리 최대한 고민해두자. 이마저도 어렵다면, 적어도 '어느 선택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지'라도 결론을 내려두면 훨씬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3)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사고
→ 나는 무엇을 시도했고, 그 결과는 어떠했나?
3년 반 동안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상품/서비스 기획, 생산 관리, 마케팅, 유통과 CS까지. 모두 선택이 아닌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내 시야를 넓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각 영역에서 내가 무엇을 얼마나 잘했고, 앞으로는 어떠할지에 대해서는 정리할 겨를이 없었다.
실패 이후의 선택은 분명 그 이전보다 나아져야 한다. 그러려면 가설을 통해 검증된 데이터가 필요하다. 일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나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어떤 가설을 갖고 시장에 접근했고, 얼만큼의 성과로 확인이 되었는가',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했을 때 어느 정도의 성취를 할 수 있었는가' 등의 검증 말이다. 이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우리는 실패를 정의하고, 기존의 방향성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거나 같은 방식을 다른 방향성에 접해보는 등 유연하게 보다 나은 넥스트 스텝을 밟을 수 있다.
4) 주변 사람들과의 유대
→ 나를 신뢰하고, 나의 도전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실패 후에 주변 사람들에게 외면받았더라면 말이다. 그런 부분에서 나는 행운아다. 많은 분들이 과분한 도움을 주셨기 때문이다. 진심어린 조언, 면접 혹은 입사 제의, 적극적으로 임해준 레퍼런스 체크(평판조회)까지. 방식은 제각각이었지만, 이것들이 모여서 큰 힘이 되었다.
실패는 우리의 몫이지만, 오롯이 혼자서 겪어내야 할 이유는 없다. 성공이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하듯 실패 또한 그러하다. 재창업이든 재취업이나 프리랜서 일이든 기회는 결국 사람을 통해서 온다. 언제나 겸손하고, 주변 사람들과 좋은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 인생의 절반은 누굴 만나느냐에 달려있다.
IT업계에는 'A/B테스트'라는 개념이 있다. UX/UI나 알고리즘, 광고 소재 등을 A안과 B안으로 유저에게 다르게 제공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정량적으로 측정해서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는 방법론이다. 우리가 보는 스마트폰의 인터페이스나 유튜브의 추천 로직이 이러한 A/B테스트를 거쳐 탄생했고, 이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쿠팡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마주치는, 우리의 필요에 딱 맞는 상품과 광고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탁월함을 만들어내는 곳에는 대부분 이러한 반복적인 실험과 분석이 존재한다. 시장과 고객의 fit에 딱 맞는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 때까지 지속적인 실험과 실패는 불가피하다.
누구나 알다시피, 한 번에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언젠가 우리는 한 번쯤 실패에 직면하게 될 거고, 그때도 당신의 도전이 지속가능했으면 좋겠다. 배수의 진을 치고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싸우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런 시대는 끝났고, 그럴 필요도 없다. 아무나 그런 방식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지속가능성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