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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의 하루 Dec 20. 2023

6주 차 - 분홍 뱃지


임신 후 아내에게 가장 무리가 가는 것은 바로 ‘출퇴근’. 아내는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출퇴근 노선 중 하나인 1호선-2호선 신도림역 환승을 하면서 출퇴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걱정이다. 퇴근할 때 신도림역은 ‘지옥철’이라고 불릴 정도니 승객들끼리 서로 누르고 눌리는 일은 다반사다. 다만 임산부에게는 이런 눌림이 특히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 문제다. 출퇴근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아내도 빠르게 분홍색 임산부 뱃지를 받았다. 아내는 소중한 이름표라도 되는 듯 외출할 때면 늘 들고나가는 가방에 옮겨 달고 나갔다. 대중교통에서 조금이라도 효용성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 반, 그리고 아이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길 기대하는 마음 반.


하지만 분홍 뱃지가 출퇴근 길을 비롯한 대중교통에서의 편리함을 보장해 주는 만능 마패? 는 아니다. 출퇴근 시간을 비롯해서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비키지 않는 노인들과 청년들이 많다고 했다. 본인이 직접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말하기가 어려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 임산부 있는데 좀 일어나시죠’하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는 척을 하는 사람들 덕분에 아내는 분홍뱃지를 달고도 출퇴근 시간에 서서 지하철을 탔고 밀려드는 사람들에 눌리면서 다녔다. 몇 번은 도저히 안 되겠다면서 신도림역에서 집까지 1시간을 걸어온 적도 있었다. 불편을 넘어 아이들의 건강까지도 위협하는 일이었다. 단순히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는 것 말고도, 오히려 분홍 뱃지를 달면서 부작용도 있었는데. 분홍 뱃지를 달고 있는 아내를 뚫어져러 쳐다보는 아저씨며, 배를 쳐다보는 사람들, 아내의 배를 만져보는 할머니, 아니면 ‘임신하면 집에나 있지 왜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냐’며 면박을 주는 노인도 있었다. 나 같았으면 혐오에 가까운 표현으로 응대했을 테지만, 아내는 그런 모진 성격이 안 됐다. 아이들이 배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떤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임산부는 손해다. 괜한 갈등을 피하는 게 오히려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다.


분홍뱃지가 나온 이유는 분명 사회의 구성원들이 배려해줘야 할 대상, 임산부에게 배려를 충분히 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뱃지 없이도 배려를 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이 뱃지 하나를 달았다고 배려를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될 리도 만무하다. 결국 나부터 배려를 해주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만날 수많은 분홍 뱃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배려라도 해주는 것. 그리고 그 배려가 돌고 돌아 내 아내, 내 가족에게도 돌아오길 기대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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