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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잠 Mar 26. 2020

소설을 통해서 생각해보는 우리 삶의 이야기

<마티네의 끝에서>를 읽고 (1)

히라노 게이치로의 <마티네의 끝에서>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설레었다.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이렇게 우아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부럽기도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표현처럼.
"그 사람은 신이 장난 삼아 날려 보낸 종이비행기 같은 재능을 가졌어.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어느 순간 홀연히 나타나 똑바로 휘이익 언제까지고 떨어지지 않는 종이비행기... 그 궤적 자체가 아름다워."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통해 나타난 표현은 내게도 그렇게 와 닿았다.
'신이 장난 삼아 날려 보낸 종이비행기 같은 재능,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어느 순간 홀연히 나타나 똑바로 휘이익... 언제까지고 떨어지지 않는 종이비행기.. 궤적 자체가 아름다운 종이비행기...'

다만 종이비행기인 탓에 너무도 연약하다, 찢기고 젖고 구겨지기 쉬운 종이인 탓에, 마치 인간의 모습처럼.
'인류는 생물로서 기껏해야 걸어서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의 환경 속에서 진화'해온 것이다.
'사육주의 손을 떠나 야생화한 시간의 무리', 인간.
일본 소설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미온적인, 잔잔하면서도 파장을 일으키는 문체가 번역본임에도 느껴졌다.
이 글을 번역하신 분은 유명 베스트셀러 <나미아 잡화점의 기적>을 번역하신 분이기도 하다.

<마티네의 끝에서>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우리 내면의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갈망하고, 생각하고, 아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비상하기 위한 용기 있는 시도.

흔히 사람들은 과거는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말하곤 한다. 그런데 책을 통해서 나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주인공의 말을 통해서 표현된 작가의 언어는 이렇게 나에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항상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과거는 그만큼 섬세하고 감지하기 쉬운 것이 아닌가요?"

이 말이 중요한 것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인 것 같기도 하고, 두 번에 걸쳐 등장한다. 소설 앞부분과 소설 말미에...
소설을 끝까지 읽어볼 때에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더욱 와 닿지만, 이 표현 때문에 나는 읽는 내내 설레고 집중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과 어긋남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이 '당한' 이별이지만, 그들의 선택이기도 했다. 서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들만의 이유...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 이기 때문에 사랑에 대한 표현도 자주 나온다. 그 표현들이 내겐 잘 와 닿았다.
우아하고 차분하게, 아프지 않게 위로받게.
그리고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랑의 습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이 많았다.
 
'사랑의 효능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이와 함께 인간이 연애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은, 사랑하고 싶은 열정의 고갈보다  '사랑받기에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가'라는, 하지만 그 사람에게 값할 만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 없다면 사랑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지나간 나의 인연들과 내가 이어지지 못했던 심플한 이유도 책을 읽으며 정리가 되었다.
'만일 이번에 만났을 때, 단순히 첫 만남을 서로 확인하는 정도로만 얘기하고 헤어진다면 두 사람은 결국 긴 인생 속에서 '두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관계로 끝나버릴 터였다.'라는 문장에서나,
'어떤 연애에나 그 과정에는 이런 위장된 우연이 한두 가지쯤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죄 없는 거짓말은 대부분 상대도 어렴풋이 눈치를 채 버리는 어설픈 비밀이다.' 등의 문장이다.
우리의 지나간 인연들은 그렇게 '밥을 한 두 번 먹은 사람'이나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비워진다.

연애에 대한 표현도 좋았다. 어디서 본 적 없는 문장을 만날 때에 설레고 재미있기에,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을 때에는 자꾸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들썩거리게 된다.

"젊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육체와의 경계쯤에 매우 가연성이 높은 부분이 있다. 어느 순간 우연한 계기로 그 한끝에 불이 붙으면 그것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서 손을 댈 수 없게 되고 만다. 그 불길에 상대의 마음이 만나 불타버리면 두 사람은 단지 고통에서 달아나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원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젊은 시절의 연애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빠져버리는 실수를 하게 되고 돌이키고 싶은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작가는 불같이 타오르는 사랑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다.
'사랑이 만일 그러한 것이라면 애초에 길게 이어질 리 없다. 그 불길은 어딘가에서 좀 더 온화하게 지속되는 열기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이란 그러므로 젊은 사람에게는 일종의 느슨해진 연애일 뿐이다. 그 앞에 뻔히 보이는 결혼에는 아무리 큰 축복이 넘치더라도 한 줌의 체념이 섞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해버린 것도 내 인생의 현실이죠,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나는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이에요.'라는 표현, 이런 사랑의 고백을 받아본 사람과 받아보지 않은 사람, 이 두 존재가 현실에 존재하게 느껴진다.

아... 멋지다. 소설의 주인공은 클래식 연주를 천재처럼 하여 많은 시샘과 부러움, 사랑을 받지만, 나는 작가의 글을 보면서 그런 마음을 느꼈다.
'신이 날려 보낸 종이비행기'같은 작가, 그런 글을 쓰는 작가.
아무튼 내가 이런 표현을 하지 못함을 알기에, 나는 감히 소설에 뛰어들 수가 없다. 소설가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 문장이 가득 담겨있는 책이기에 나는 부러워하며 포기하며, 그저 독실한 독자로 끝까지 책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다.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는 남자 주인공과의 대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작품의 해석에는 가능한 한 작곡가의 의도나 심경이나 세계관을 파악해보려고 노력하는 게 최소한의 성실성이라고 생각해요."
이 말을 책을 읽으면서도 생각하게 된다. 작가의 작품을 해석할 때에는 가능한 한 작가의 의도나 심경, 세계관을 파악해보려고 노력하는 게 최소한의 성실성이라는 것을. 나는 그런 독자이고 싶다.



참조 : 히라노 게이치로, <마티네의 끝에서>, 아르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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