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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riaMJ Mar 23. 2021

오마카세

맡길 수 있는 건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고,

홀로와 혼자도 다르다.

뭐든지 혼자 하는 걸 좋아하는 내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가장 귀해져 버린 요즘,

한 번씩 혼점하는 시간을 선사한다.

혼밥 레벨이 굉장히 높아, 마라탕도 고기도 뷔페도

이미 혼자 먹어본 나는

오늘 처음으로 혼자 스시야에 갔다.


런치/디너 모두 오마카세.

크기가 작은 가게는 혼자 가면 더 티가 나는데

오마카세 식의 가게는 그래서 더 좋은 점도 있다.

제일 안쪽 바 자리는 아늑했고,

내 앞에 놓이는 음식은 훌륭했고

끊임없이 나를 신경 쓰는 셰프는 단정했다.


벽면에 적힌 お任せ라는 글씨중에서 눈에 들어온 건 맡길임자. 사람인변에 工자가 壬자가 되었다고는 하는데, 어찌 되었든 능숙하게 솜씨 좋은 모양새로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한다는 것인데 책임 할 때의 '임'이란 글자와 같으니 허술하고 가벼운 자는 아니다.


오늘 셰프의 태도는 그 글자에 꼭 맞았다.

평소라면 비려서 먹지 않았을 고등어와

느끼한 장어를 패스하지 않은 건, 오늘만은 오마카세에 충실하고 싶어서였다.


누군가에게 내 한 끼를 오롯이 맡긴다는 건

약간은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보통 끼니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르는데

몇 피스의 스시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모르니까.

오마카세는 신뢰가 바탕이다.

이 셰프가 내놓을 음식이 좋을 거라는 믿음이 없으면 먹는 내내 불안할 테니.


무엇이 믿음을 구성하는가.

당연히 좋은 재료와 탁월한 음식이 기본. 거기에 속도와 양의 조절, 간결하고 정확한 설명, 굳이 더하자면 편안하고 단정한 손님과 셰프의 호흡.

오늘의 오마카세는 내게 믿음을 줌과 동시에

'맡긴다'는 건 참으로 어렵구나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


내가 거의 전적으로 믿는 사람은 엄마가 유일한데,

(그래서 엄마카세가 있는 걸 지도)

그게 내가 의심이 많아서라기보다

원래 무얼 맡긴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기 때문이라고 재해석해본다.


잘 맡기지 못하는 사람은 피곤할 수밖에 없는데

오늘 점심 한 끼라도 오롯이 맡기고나니

오후 내내 기분이 편했다.


왜 잘 맡기지 못하냐고, 좀 믿어보라고 아우성치는

많은 것들에게는 오마카세의 어려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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