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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May 16. 2024

82년생 직장인 #2

대한민국에서 배가 고픈 건 참아도 아픈 건 참을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여전히 너에게 틈틈이 인생 강의를 해주던 팀장이었지만, 한편으론 너의 뒷담화를 더 많이 하고 다니는 것 같았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직장 내 가스라이팅인가?


한 번은 팀장이 가족상을 당해 부재중일 때 너는 급하게 백화점 행사 세팅을 해야 했다. 너는 임의로 의사 결정을 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까칠한 팀장인데 상중에 일적으로 연락하면 또 무슨 욕을 먹을지 몰랐으니까. 너는 나름 숙고하여 팀에 최대한 도움이 되도록 판단했고 팀장이 돌아오면 칭찬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욕은 안 할 거라 생각했다.


"야 이 새끼야! 너 한 번만 더 니 마음대로 일 저지르면 죽여버린다!"


팀장이 열 올리며 너를 잡아먹을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너가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팀장은 즉시 '본인이 부재중일 때 개념 없는 담당이 컨펌도 안 받고 마음대로 저지른 거라 무효'라는 내용으로 단체 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너는 모든 사람의 눈총을 받았고 '개념 없는 너' 때문에 행사가 취소되었다. 너는 늘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퇴근했지만,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분노의 자전거 페달을 밟아대며 한강으로 향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영화 배우 로버트 드 니로를 닮은 새 지점장이 부임했다. 지점장이라면 매일 수백 통의 메일을 받을 텐데 그는 말단 직원이 보낸 메일 하나에도 반드시 답장을 해주는 따듯한 리더였다. 특히 그는 신앙심이 깊었고 배려심이 많았으며 축구를 좋아했다. 너는 그를 직장 생활의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점에는 직원 단합을 위한 크고 작은 문화 행사가 많았다. 너는 항상 그런 일을 도맡아 했다. 가뜩이나 일도 빡센데 업무 외에 자잘한 것들까지 신경 써야 해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팀장은 일이나 더 열심히 하지 쓸데없이 나대는 것처럼 보이는 너가 더 못마땅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가 이 조직에 있어야 할 존재 이유는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학창 시절에 너는 친구들과 축구를 하려고 등교했을 정도로 축구를 사랑했다. 남자들은 축구만 잘해도 어딜 가나 점수를 따고 시작한다. 군대 문화가 남아있는 거친 유통업에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에 축구만한 운동도 없다. 


지점의 체육 부장을 자처한 너는 직원들의 거주지를 고려해 구장을 예약하고 늘 상대팀을 섭외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게다가 축구 실력도 빠지지 않으니 지점장과 직원들은 너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팀장이 애써 구겨놓은 나의 이미지도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너가 팀장에게 혼나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루는 팀장이 "내가 만약 다른 데로 발령이 나면 그때 너한테 15년 노하우가 담긴 특급 영업 기밀을 알려줄게."라며 기대치 못한 약속까지 하기도 했다. 뜬금없이 발령 이야기를 하는 팀장의 촉이 맞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팀장은 다른 지점으로 발령났다. 


환희에 차서 소리 지를 줄 알았던 너에겐 의외로 착잡함이 밀려왔다. 너는 이제 겨우 팀장의 마음에 들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동안 노력해 온 것이 아까웠고, 일 잘하는 팀장에게 더 배우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크게 느꼈다. 무엇보다 너는 그가 빠진 팀의 실적을 과연 누가 와서 커버할 수 있을지 불안해하고 있었으니까.


팀장의 환송회가 끝나고 너는 팀장에게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약속했던 15년 노하우가 담긴 특급 영업 기밀을 알려달라고 청했다. 뱉어놓은 말 때문인지 팀장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건 진짜 돈 주고도 못 듣는 거라며 서서히 비밀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 너는 이해가 안 되어 이게 무슨 기밀인가 싶었지만, 후에 연차가 쌓일수록 팀장의 말이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팀장의 노하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핵심 인재가 되기 위해 ‘있어빌리티’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너는 MD로서 글로벌 A급 브랜드를 영입하라는 고난도의 미션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사실 회사에서도 축적된 히스토리가 있어 미션 달성이 어렵다는 걸 아는 상황이다. 그런데 마침 그 브랜드가 K-컬처의 영향을 받아 올해 처음으로 한국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면? 기가 막힌 타이밍에 미팅을 했고 의외로 수월하게 브랜드의 OK 사인을 받아낸 상황이다. 이 엄청난 성과를 어떻게 보고하면 좋을까?     



(3화에 계속...)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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