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장난
그는 나를 ‘매니 픽시 드림걸’이라 불렀다. 이 용어는 영화계에서 쓰이는 말로, 마블 히어로 무비의 여주인공처럼 (스파이더맨의 엠제이 같은 롤) 이상형에 꼭 맞는 꿈속의 여성을 말한다. 서로를 드림걸과 드림보이로 부르는 건 기분이 좋았다. 어감 자체가 요정 가루를 뿌린 것 같고, 판타지와 마법을 연상케 했다. 우리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면을 따져도 적절한 수식어였다. 다르게 말하면 이상형, ‘피그말리온’ 같은 것이다. 자기 이상형을 조각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피그말리온처럼 지호는 내 피규어를 만들겠다며 오타쿠 흉내를 냈다.
피그말리온이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고 불안하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상징이라는 것의 허망함, 허구에 대해 말하는 우화니까. 한번은 지하철역에서 공원까지 걸어가는 길에, 지호에게 눈을 감아보라고 했다. 날 믿고 눈을 감으면 내가 너를 끌어주겠다고. 그는 동공이 흔들리며 불안해 보였지만, 이내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의 팔을 잡고 턱을 넘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러다 그를 보니 실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야 너, 나 못 믿어?”
“스냅샷처럼 기억하고 싶어서… 살짝 뜬 거야…”
서로를 아무리 좋아해도 완전히 믿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린다. 아니, 아예 서로의 존재가 진짜인지를 잘 못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연애가 실재하지 않는 현상이라고 여겼다. 지금 내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게 맞나? 저 사람과 사귄다고? 자주 볼을 꼬집었다. 그냥 식당가서 음식과 술을 먹으면서도 생각했다. 지금 데이트가 상상이고 진짜 현실은 혼자 앉아서 술 먹고 있을 수 있다고. 그런 기괴한 농담을 자주 주고받았다.
“말이 안 돼. 현존하지 않아. 우리 사진 찍은 것도 알고보니 혼자 셀카 찍은 거 아냐? 소름...”
우리는 망상병에 걸린걸까? 따져보면 절대적이거나 확실한 게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우리는 끝에 끝까지 뒤집어 보고 의심하는 성향이 좀 있었다. 데카르트도 아니고. 그런 우리에게 커다란 관념인 ‘사랑’이 왔으니 믿기 힘든 거였다. 이렇게 좋은 게 내 삶에 왔다는 것이.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것들도 모두 허구라고 생각해버리면 어떨까? 그럼 권태기가 올 겨를이 없을 것이다. 금방 스러질 꿈처럼 귀해지니까 말이다. 만약 이게 꿈이라도 좋은 꿈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는 말한 적이 있다.
“사실 네 존재 자체도 상상이고 내가 회사 다니는 것도 망상이고… 근데 상상이라도 너가 있어서 좋아.”
특히 연애 초기엔 서로의 형상이 구체적이지가 않고 뿌옇게만 보인다. 아직 상대에 대해 잘 모르면서 감정만 커서 그렇다. 뭉뚱그려진 형상은 내가 그리던 이상형에 꼭 맞아 보인다. 삐져나온 부분은 무시하거나 억지로 끼워 맞춘다. 오래 사귀면서 상대가 구체적으로 보이게 되면 환상이 벗겨지고 현실로 믿어지게 된다. 언젠가는 너무 일상적이어서 지겨울 날도 오겠지. 드림걸, 드림보이에서 그냥 걸, 보이로.
드림을 빼고 봤을 때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될지 궁금하다. 이 부분은 내 드림이 아니었구나, 이 사람은 이제 현실의 영역이구나 하며 공중에서 땅으로 내려올 것이다. 어쩌면 궁극적 목표는 다음과 같겠다. 내 이상형을 생각하게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존재하는 것, 그걸 인정하는 것, 꿈과 현실의 비중을 조절하는 것, 땅에 발을 디디는 것, 피그말리온의 세계에서 깨어나 일상에 구체적인 사랑을 놔두는 것, 눈을 더 또렷이 뜨면서도 관계 맺을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