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장난
평소에 상황극을 자주 즐긴다. 밸런스게임처럼 둘 중 하나 선택하는 것보다는 서사가 있는 상황을 설정하길 즐긴다. 대화를 길게 이어 나가기에도 좋으니까.
연예인이 나한테 플러팅한다면? 사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거고 트루먼쇼처럼 모든 것이 연기로 짜였다면? 우리가 에이리언을 낳는다면? 1700년대 스코틀랜드 반란군이 된다면? 같은 디테일한 설정들을 하는 거다. 우린 고궁에 놀러 가서도 정조와 정약용의 퀴어 로맨스물을 상상하거나, 조선시대 왕이 베이스 기타를 친다? 같이 뜬금없는 상상을 하는 식이다. 이질적인 두 조합을 합쳐버리면 예상치 못한 웃음이 나온다.
지나가는 사람이나 사물을 보면서도 가끔 더빙을 한다. 어린아이를 보고 할아버지 목소리로 흉내 내보는 식으로. 그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도 특별하고 이질적인 순간이 될 수 있다. 상황극을 통해 시공간을 넘나들고 다른 인물이 되어본다. 마치 문학이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실의 다른 부분을 펼쳐 보이는 것, 잠재돼 있던 상상을 둘이 확장해 나가는 것.
상황극의 장점이라면 지루함을 덜 수 있다는 거다. 솔직히 매 순간 나 자신으로만 사는 것도 질리고 재미없는 일이다. 가끔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도 혼자 상황극을 하기엔 뭔가 허전하다. 이럴 때 장단을 맞춰주는 상대가 있으면 더 몰입되어서 좋다.
만약 당신이 명절에 장거리 운전을 한다면 창밖 풍경을 보고 끝말잇기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한 공간에 갇혀있는 상황엔 더 이상 새로운 게 없어진다. 차 사고가 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럴 땐 먼 세계의 이미지들을 불러오는 게 좋다. 그럼 축 쳐진 뇌에 반짝 자극을 주고 차에서 벗어나 멀리 가볼 수 있다. 옆 차선의 차 운전자와 창문 열고 대화를 나누다 친해진다면? 이대로 차선을 잘못 타 이상한 곳으로 빠져서 거기서 명절을 지낸다면?
특히 지호는 상황극의 달인이다. 보통 사람들은 A 아니면 B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는 C, D까지 창의력을 더해 멀리 확장한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건지도 짐작이 안 된다.
“만약 소개팅을 했어. 상대 이빨에 고춧가루 끼면 어떡할 거야?”
보통 사람들은 두 가지 옵션을 상상할 것이다. 고춧가루 꼈다고 말해 주거나 끝까지 말 안 하기. 그런데 지호는 틀을 벗어난 해결책을 몇 초 만에 떠올리는 것이다.
“그 사람한테 말할거야. 자 이제부터 절 따라 하기 게임해볼게요. 먼저, 이- 해보세요 그러고 칙! 물 부어 고춧가루에 꽂히게 물로 석션하고 가글까지 짠-“
한편, 복제인간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
“나랑 맞짱부터 떠야지. 64명의 복제인간 중 강한 ‘나’만 살아남는 거야. 난 자기혐오라서 일단 패고 시작해.”
이런 상황별 대답들이 궁금해져서 나는 자꾸만 이상한 질문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