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고 하늘은 청명하고 날씨는 시원하고 평야에는 황금물결이 넘실거린다. 길가의 이름 모를 꽃과 풀들도 수줍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며 우리의 발걸음을 잡는다. 사진 한 장 찍으며 걔네들에게 반갑게 인사한다. 날씨와 주변의 들꽃들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 함께 걷는 길동무들도 수다를 떨며 흥에 겨워 웃는다. 길은 우리를 웃게 만든다. 길가의 모든 생명체들, 길을 걷는 길동무들, 눈앞에 펼쳐진 길이 우리를 웃게 만든다. 웃음은 모든 질병의 명약이라고 한다. 힘든 일상을 견디고 토요일을 애타게 기다리며 한 주를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보상하기 위해 나와서 함께 걷는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찾고 그 힘으로 다시 한 주를 살아간다. 숨 막히는 상황과 세상 속에서 숨 쉴 수 있고, 마음의 여유 공간을 만들 수 있는 것이 걷기다. 사람마다 살아온 과정이 다르고, 고통의 질과 양도 다르지만, 길과 걷기는 부처님의 법음처럼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준다. 덕분에 힘을 얻고, 밝은 에너지로 한 주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경기 둘레길 36코스인 도리 마을에서 현수 1리 버스 정류장까지 10.6km를 걷는 날이다. 차량 섭외를 맡고 있는 비단님이 기사님에게 36코스 마치는 지점을 알려 드린 덕분에 우리는 이 코스를 거꾸로 걷는다. 같은 길도 걷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카이스트 총장님은 TV를 거꾸로 놓고 본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법정 스님도 다리를 벌리고 머리를 숙여 다리 밑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신도들에게 따라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다. 산도 하늘도 거꾸로 보면 아래로 내려온다. 위와 아래가 바뀌고 앞이 뒤가 된다. 일상의 틀을 깨는 것은 매우 통쾌한 일이다. 길을 거꾸로 걷는 일도 틀을 깨는 좋은 방법이다. 그런 면에서 비단님의 실수는 어쩌면 의도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지키고 살아온 일상과 관념의 틀을 부수라는 매우 친절한 가르침일 수도 있다. 따라서 비단님은 우리의 스승님이 되고, 거꾸로 걷는 길 역시 우리의 스승님이 된다. 세상만사 스승 아닌 것이 없다. 다만 눈 밝은 사람들만 삼라만상을 스승님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스승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눈을 떠도 장님이요, 귀가 열려 있어도 귀머거리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틀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아집, 독선, 탐욕, 어리석음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의 틀을 벗어버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연습을 꾸준히 하면 조금씩 틀을 깨고 밖으로 나올 수 있다. 걷기는 ‘작은 자기’를 벗어던지며 좀 더 ‘큰 자기’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줄(啐)’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쪼는 것을 의미하고, ‘탁(啄)“은 어미 닭이 알 밖에서 쪼며 병아리가 태어나기 위해 돕는 동작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동작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비로소 병아리가 태어나게 된다. ’ 줄탁동시‘는 선불교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방법을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우리가 걷는 행위도 ’ 줄탁동시‘다. 홀로 걸으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니 우리 자신이 ’ 줄‘이 되고, 길과 걷기가 ’탁‘이 된다. 함께 걸으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이 ’ 줄‘이 되고, 걷기와 타인의 모습이 ’ 탁이 된다. 자신의 틀을 깨야만 비로소 세상을 보는 혜안이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열리게 된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이미 세상이 변한 것이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괴로울 때 누구나 빨리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상황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 우리를 옥죄어온다.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힘과 에너지를 아껴서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을 변화시키면 훨씬 더 쉽게 벗어날 수 있고, 주어진 일을 하는 데 아껴 두었던 힘과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
‘거꾸로 걷기’를 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이 길을 원래 코스대로 시작 지점에서 마치는 지점까지 걸었다면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거꾸로 걷기 시작한 길은 매우 편안하고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길도 좋고, 주변 경치도 아름답고, 길동무들 만나 신나고, 시원한 바람은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고, 창공은 티 없이 살라고 하고, 구름은 무심하게 살아가라고 한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철없는 아이들이 되어 흥겹게 걷는다. 무척 가파른 산을 하나 넘는다. 이 길로 걸어 내려왔다면 아마 여러 명이 넘어질 수도 있는 다소 위험한 구간이다. 정상에 오른 후부터 이어지는 편안한 능선길은 그늘과 햇빛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길이다. 야트막한 산임에도 마치 깊은 산속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하산한 후 강을 따라 걷는다. 다리 아래 짐을 풀고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점심 식사를 한다. 다리 밑에 거지들만 살고 있다는 것은 옛날 얘기다. 걷기를 좋아하는 방랑자들이 다리 밑에 모여 풀어놓은 음식은 그야말로 일국의 왕들이나 받아 볼 수 있는 진수성찬이다. 다리 밑 그늘에 앉아 하하 호호 웃고 떠들며 맛난 식사를 즐긴다.
식사 후 다시 걷는다. 눈과 가슴이 시원해진다. 맑은 허공과 시원한 바람, 여유롭게 흐르는 강물을 보며 따뜻한 햇빛이 내리쬐는 길을 걷는 재미는 걸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다. 이 길을 멋진 길동무들과 좋은 날씨에 걷는 일은 평생 단 한 번밖에 올 수 없는 매우 귀한 순간이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오늘 걸었던 길동무들과 이 길을 다음에 다시 걷는다고 하더라도 오늘 느낀 이런 감정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 그래서 매 순간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인 양 만난 사람들이 더욱 귀하고, 걷는 길이 더욱 아름답고, 주어진 모든 상항이 고마울 따름이다. 가끔 길을 걸으며 바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이 사라져 버린 바보가 되고 싶다. 즉 살아 있으면서도 감정과 생각에 매몰되지 않는 바보가 되고 싶다. 감정과 생각에 끌려 다니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을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한다. ‘작은 자기’를 깨어 부수고 ‘큰 자기’로 거듭나는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경지다.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작은 자기’를 버린 후에 저절로 드러나는 ‘큰 자기’를 의미한다.
마지막 산을 하나 더 넘는다. 매우 아름다운 산길이다. 이 길 역시 깊은 산속에 들어온 느낌이 든다. 조금 오른 후에 완만한 내리막길을 걷는다. 제법 긴 내리막길이다. 이 길을 거꾸로, 원래 계획대로 시작점부터 오르기 시작했다면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비단님 덕분에 어렵고 긴 오르막을 여유롭게 내려가는 내리막길로 만들 수 있었다. 비단님의 현명한 판단에 감사함을 전한다. 36코스 시작점에 너무 일찍 도착해서 다시 차를 타고 오늘 시작했던 36코스 끝나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37코스를 걷기 시작했다. 한 시간 동안 5km를 더 걸었다. 길동무들의 걷기 열정은 참으로 대단하다. 차를 타고 여유롭게 출발해서 서울에 도착하니 오후 5시 반이 조금 지났다. 먼저 귀가할 길동무들은 가고, 남은 8명은 헤어짐이 아쉬워 뒤풀이에서 못다 한 얘기를 나눈다. 오늘 같은 날을 만들어준 길동무들, 자연,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벌써 다음 주 토요일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