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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요 Oct 09. 2020

그림 그리려고 퇴사하다니

03

 

  제목만 보면 자극적인 설정 같지만 실상 퇴사 결정에 60% 정도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변인들에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 퇴사한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내가 매일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확신 못 했기 때문이다. SNS에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를 보고 무작정 부러워만 하던 시기였다.


  직장생활을 한 이후로 끊임없이 주변인에게 회사생활이 무어냐고 묻고 다녔다. 누구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도 퇴사에 대한 욕구는 끊임없이 나를 자극해왔다.     


  이전 직장은 공기업이면서 처음으로 내 전공을 살린 곳이었다. 그 전 두 곳은 돈을 벌기 위해 다닌 회사였다. 전공 살린 직장은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듯 보였다. 입사하고 신입 사원에게 가혹하다는 환경에서 버텼다. 그래도 하루하루 보람찬 회사생활이었다. 힘들었지만, 삶의 주도권을 쥔 기분이 들었다. 그런 회사생활은 얼마 못 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회식 자리에서까지 회사생활을 해야 했고, 그 자리에서 상사에게 부당한 일을 당했다. 다른 직장 상사 아무도 그 상황을 말리지 않았다. 행하는 자와 방관하는 자 모두가 나쁘다는 사실을 몸소 겪었다. 그때가 입사한 지 4개월 차 되던 날이었다. 나는 문제를 제기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를 나가지 않고 일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그 상사는 오랫동안, 이 직장에서 일했던 사람. 그 사람들의 측근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말들로 나를 때렸다. 누군지 모른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참지 그랬냐, 너무했다 등. 그때 나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그만큼 내게도 이곳이 소중했다.     


  그 이후로 일에만 매진했고 나 자신을 방관했다. 그때 적절한 휴식과 치료가 진행됐다면, 이렇게 힘들게 퇴사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전공 살린 일이 무어라고, 공기업이 무어라고 그렇게 버텼을까. 이 작은 회사가 무어라고, 나는 자책하고 나약한 인간이 되어갔다. 조용히 견디고 이겨내느냐, 다 놓느냐는 당시 내 숨통을 조이느냐 푸느냐와 같았다. 그 뒤로 약 2년의 세월이 지나기까지 투쟁의 시간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미워한다는 것은 다신 겪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실제로 그랬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황상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위축되는 자신을 느끼며 일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다 만난 게 ‘그림’이었다.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계속하고 싶은 무엇. 자꾸 궁금해지고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한 기회로 그림책 한 권을 만들게 되면서, 그림에 대해 더욱 간절해졌다. 그림책을 만들기 위해 퇴사를 하고 싶어졌다. 퇴사를 적극적으로 말려준 분들 덕에 퇴사 대신 6개월 휴가라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아갔다. 담당 의사는 내게 써줄 말이 없다고 했다. 약을 준다고 했었나. 간단한 소견서를 받아 회사에 제출했지만, 휴직은 어렵다고 했다. 예전 일 때문에 힘들다고 호소했으나 이미 그 일은 너무 오래 지난 일이라 인정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1년 반이 더 지났을 때, 나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표는 바로 수리되었다. 사직서 제출 바로 전날 회사 행사가 있었고, 내가 직원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다음 날 사표를 쓴 것이다. 귓전을 때리던 소음들이 그제야 잦아들었다.

  

  버티고 버티다 더 버틸 수 없을 때 회사를 나오면 쉽게 회복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좀 더 마음이 건강했다면, 바로 무언가 할 수 있었을 텐데, 삶의 나락에서 할 수 있던 것은 그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나 자신도 돌보기 싫었고, 그냥 그리고만 싶었다. 처음으로 잘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서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렸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까지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나는 그 이유로 퇴사한 것이 맞다.

앞으로도 그림을 계속 그릴 거니까
나는 계속 그림 그리는 사람이다.


[그림 위를 걷는 고양이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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