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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리 Oct 02. 2022

5. 세 가지 증상과 두 번째 퇴사 고민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에 도착해보니 신제품 론칭 준비에 한창인 시기였다. 다들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나도 새로운 오피스에 적응을 하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들과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바쁘게 일하는 내 모습이 그럭저럭 괜찮게 느껴졌다.


프리랜서로 계약했던 한 달은 금방 흘러갔다. 내 마음은 여전히 비슷했다. 회사를 떠나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었다. 회사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필요했다. 그렇게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졌고 나는 비자를 받고 정식 외노자가 되었다. 야근은 매일 계속됐고, 주말 근무도 잦았지만 적어도 주말에 타국의 호텔에서 키보드를 두드릴 일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게다가 마침내 깨끗하고 천장이 높은 신축 스튜디오에 캐리어를 풀 수 있게 되었다. 독립한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 산다는 뿌듯함과 자유로움이 나를 간질였다.


주말에는 일을 하고, 쇼핑을 하거나 예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마사지를 받으러 다니는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어떻게든 잘 마무리 지으려고 노력했고, 바쁜 시기가 조금 잦아들면 말레이시아 주변국이나 다른 도시로 여행을 떠났다. 썩 괜찮은 생활이었다. 다들 그렇게 말해줬다. 그래서 나는 이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계절이 없는 곳에서 혼자서 살다 보면, 시간이 커다란 덩어리처럼 지나간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무거운 시간이 어느덧 가벼운 연기처럼 변해 훅 불면 날아갈 듯 스쳐간다. 그렇게 3년이 흘렀고 나는 삼십 대 초반이 되었다. 




이거 뭔가 잘못되고 있는데,라고 느낀 건 결코 하나의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여러 해동안 차곡차곡 쌓인 증상들이 하나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증상

나는 분명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점점 더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내 증상을 크게 세 개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1. 폭식하는 날이 많아졌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날마다 내가 하던 일종의 의식 혹은 위로의 행위가 있었다. 바로 불닭볶음면과 스트링 치즈 4개를 먹고 뒤이어 슈퍼에서 산 반숙란과 햇반 하나를 남은 소스에 비벼 맥주 한 캔과 같이 먹은 후 “아이고, 배 터지겠다. 소화가 안되네."를 중얼거리며 볼록 나온 배를 보며 내 선택을 자책하는 것.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실질적인 속 부대낌으로 대체하는 것. <불닭볶음면과 아이들> 세트 혹은 과식을 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2. 어깨와 목 통증이 더 심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고질병이었던 어깨와 목 통증이 더욱더 심해졌다. 마사지 정기권을 끊어 매주 마사지를 받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마사지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어깨뿐만 아니라 등과 목 역시 긴장되어 있어 숨을 크게 쉬는 것조차 어려운 날도 늘어갔다. 그럴 때면 응급처방을 하듯 한의원에 달려가 침을 맞거나 다른 종류의 마사지를 받는 것을 반복했다. 


3. 짜증가 화가 늘었다. 

짜증이 엄청나게 늘었다. 아무리 바빠도 사람들에게 짜증을 낸 적은 (많이)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 새 메일만 봐도 짜증이 나고, 일과 관련된 문자만 봐도 화가 났다. 핸드폰 알람 소리를 듣는 게 괴로웠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거는 것도 싫었다. 갑자기 훅 하고 짜증이 올라오면, 나는 그 사실에 또다시 짜증이 났지만 동시에 미안하고 당황스러웠기에 그 마음을 억누르고 건조한 대답을 하는 것을 반복했다. 이어폰을 끼는 날이 늘어났다.



아,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 걸까······.
내가 이런 사람인가, 그건 싫은데······.


몸이 아프면 마사지를 받으면 잠깐 회복이 된다. 아마 처음 마사지를 받고 나서 그 개운함은 하루 정도 지속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사지를 너무 받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마사지를 받아도 딱 그때만 몸이 풀렸다. 마사지 유통기간이 내 몸에서 짧아진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정신이 힘들 때, 자극적인 음식을 입 안으로 집어넣으며 자극적이고 웃긴 영상을 본다. 먹으며 영상을 보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잊는다. 하지만 순간일 뿐이다. 그 후에는 더부룩함과 한층 무거워진 게으름을 어깨에 진 채로 샤워를 하고 침대로 가서 눈을 감아야 했다. 또 출근을 해야 되니까.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긴 호흡의 영화를 볼 정신적 힘이 없어졌고, 책에도 집중할 수 없었기에 도대체 어 해결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렇게 시간이 점점 흘러갔고 쉬어도 쉬지 않은 느낌은 걷잡을 수가 없이 커져갔다. 휴가 때도 쉴 새 없이 울리는 메일함과 메시지를 보기만 해도 신경이 곤두서는 듯하고 뒷골이 싸하게 당겼다. 



너무 힘이 들었던 어느 날, 나는 요가도 하고 싶고 읽고 싶은 책도 많은데 내 시간은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상을 꾸릴 시간을 점점 더 많이 갈망하게 되었다. 여백이 큰 일상이 궁금했다. 딱히 여행을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알람 없이 일찍 일어나서 빨래하고 요리하고 요가하고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책 읽고 글 쓰고, 저녁에는 축구나 영화도 보고······. 뭐 그런 것들이다. 보통 주말에만 할 수 있는 일들, 빈 시간의 평화로움.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두 번째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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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퇴사하고 뭐할 거야?

직장인이 된지 7년만에 처음으로 그 답이 쉽게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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