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커피를 좋아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커피 맛을 즐기던 사람은 아니었다. 대학 시절의 나는 커피를 '마신다기보다 마셔야 하니까' 마시는 사람이었다. 밤새 설계를 해야 할 때, 피곤한 아침에 정신을 붙잡기 위해 자동판매기에서 나오는 달달한 밀크커피를 들고 다녔다. 입에는 달콤했지만 마시고 나면 배까지 불러왔고, 그 한 잔으로 피곤한 하루를 간신히 버티곤 했다.
자판기 앞엔 늘 선배들이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그걸 사이에 두고 나누는 이야기로 하루가 시작되곤 했다. 그 시절, 커피는 '맛'보다는 '버팀'의 도구였다. 단순한 습관처럼 따라 했던 일상이었다.
카페모카나 바닐라라테처럼 달달하지 않으면 커피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아메리카노는 무슨 맛으로 먹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쓴 맛은 나에게 어려운 영역이었고, 카페에서 주문한 커피는 밤도 마시지 못한 채 남기는 날도 많았다. 그냥 커피가 입에 맞지 않았고 진짜 커피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거다.
그러던 내가 커피를 제대로 마시게 된 날이 있었다. 처음으로 커피의 영역에 마주한 건, 호주 워킹홀리데이 시절이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호주에 도착한 어느 날, 친구가 나를 데리고 카페로 갔다.
그날 나는 생애 첫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그 쓰디쓴 커피를 왜 먹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걸 내가 마시고 있을 줄이야. 에스프레소에 설탕 가득 넣어 친구의 등떠밈에 못 이겨 마셨는데 웬걸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커피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놀라움이 입안에 퍼졌다. 그날 이후 나는 달달한 커피를 내려놓고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하지만 워홀시절의 내 생활은 여유롭지 않았다. 일과 생활비, 어학원과 집세 등, 외노자와 유학인의 어느 중간 선에 살며 그 속에서 매일 카페 가는 건 사치 그 자체였다. 그래서 커피에 빠져들기보다는 '아 그 커피 맛이 참 좋았지' 정도로만 기억 속에 저장해두고 있었고, 종종 마시며 계속해서 기억하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학교도 복학했다. 문득 어느 날 그때 마셨던 커피 맛이 떠올랐다. 순간 온 감각은 커피를 향해 있었고, 그 맛을 되살리고 싶었다. 책을 찾아보고 인터넷을 뒤지고, 유리 주사기를 구해 수동으로 에스프레소를 뽑아냈다. 마트에서 저렴한 원두를 사서 내 손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방구석 바리스타의 삶이 시작되었다.
거창한 도구나 지식은 그다지 없었다. 유리 주사기로 압력과 뜨거운 물을 이용하여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셨고, 그다음엔 프렌치 프레스를 사서 커피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회인이 되어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드립커피 도구를 하나둘 사모았다. 나를 위한 작은 선물이자 생존 장치 같은 것이었다.
커피를 내리는 그 순간은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이 되었다. 뜨거운 물이 천천히 내려오고, 커피의 향이 퍼지는 그 짧은 몇 분 동안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커피는 여전히 어렵고 복잡한 세계였지만, 그만큼 흥미로운 대상이기도 했다. 다양한 원두와 맛의 차이를 알게 될수록 이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때는 어디까지나 ‘작은 취향’이었다. 방구석 바리스타로서의 실험,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블로그도 시작했다. 예전에는 간간이 글을 쓰곤 했지만, 본격적으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건 취업하고 사회인이 되기 시작한 시기부터였다. 내 하루를 오롯이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회사 일은 점점 고단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서 기록하지 않으면 내 삶이 증발해 버릴 것 같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인상 깊었던 책 한 문장, 오늘 마신 커피 혹은 다녀온 곳에 대한 나의 느낌을 썼다.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마음보다 나를 붙들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놀랍게도 그 작은 기록이 나를 조금씩 되살리기 시작했다. 블로그에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며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허투루 흘러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와 말을 섞지 않아도, 내 감정을 말로 풀어내지 않아도, 글을 통해 나는 나와 대화할 수 있었다.
회사 생활은 힘겹고 더 고단해졌지만, 나는 다 뜨지도 못한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에 커피를 내리고, 블로그를 쓰는 이 시간을 빼놓지 않으려 했다. 그 시간이야말로 나의 시간,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면 카페로 도망치듯 걸어갔고, 야근 전 저녁엔 근처 조용한 카페에서 혼자 숨을 돌리는 시간을 가졌다. 그곳에서 마신 커피 한 잔, 눈이 마주친 사장님의 인사와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빵 한 조각이 나를 다시 일하게 만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거창한 도전이나 대단한 전환을 한 것이 아니다. 다만 좋아하는 일을 ‘조금 더’ 했을 뿐이다. 커피를 더 자주 내리고, 내 마음을 조금 더 자주 들여다보았고, 그 마음을 글로 남기는 시간을 조금 더 확보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작고 사적인 날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나를 다른 삶의 방향으로 이끌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는 이 시간들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인지, 질문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나를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이끌었다.
나는 이 길을 가려고 계획한 적은 없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자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기록이었고, 커피였고, 책이었고, 나만의 오롯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반복이 결국 나를 내가 원하는 삶의 결로 데려다주었다. 지금도 나는 커피를 내리고, 글을 쓴다. 여전히 완벽하지 않고 매일이 안정적인 건 아니지만, 예전보다 훨씬 덜 흔들린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오래도록 삶에 두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건 누군가를 위한 성공담이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자주 하며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조금씩 쌓아온 기록이다. 좋아하는 일을 놓지 않고 천천히 계속 따라가다보니 점점 나를 위한 방향으로, 삶의 결이 조금씩 나를 향해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