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밤, 사람들은 모두 집에 있거나 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저기 육교를 건너는 저 긴 생머리 여자, 하얗고 큰 베개를 안고 있네요. 몽유병이 있는 걸까요?그런데 잠옷이 아닌 옷을 입고 있네요. 작은 쇼핑백을 들고 있구요. 아마 남자친구 집에 가는 길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베개를 들고 걷는 여자가 갑자기 섹시해 보입니다. 베개는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이잖아요. 의외의 장소에서 보게 되는 의외의 물건은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오늘은 아니에요. 풀어헤친 긴 머리에 하얀 베개를 안고 있는 저 여자는 귀신같지 않고, 그저 사랑스러워요.
여자가 베개를 들고 다닐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궁금해집니다.남자친구의 베개에 같이 머리를 뉘여도 되잖아요. 저 여자 머리가 그렇게 커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지요. 혹시 자신의 베개가 아니면 잠들 수 없는 그런 여자인 걸까요?아니면 너와 나를 분간할 수 없이 가까워져, 어느 날 문득 서로를 바라 보았을 때 당황스러워질 날이 올까봐 조심하는 그녀만의 연애비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아무리 사랑해도 베개는 따로따로", 철학적인 그녀입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의 베개를 그의 집에 사두지 않음으로 그녀의 연애비법과 유사한 수를 구사합니다. 연애하는 동안에는 그녀를 손님처럼 자신의 집으로 정중히 초대하고 싶은 것이지요. 뭔가 잘 이해되지 않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아무리 사랑해도 네 베개는 네 장롱에", 매력적인 그 입니다. 만약 그가 그녀에게 자신의 장록 속에 놓여진 귀여운 새 베개를 선물하며 청혼한다면 제가 당장 뛰어가서 그와 결혼해버리겠습니다.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하루종일 남자친구와 같이 있다가 밤이 되면 다시 베개를 안고 육교를 건너,
여자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겠지요. 사랑을 초대할 자신의 공간이 있고, 사랑에 취했던 시간이 지나고 혼자 남아 적당히 외로워 할 방을 가진 어른들이 하는 연애의 즐거움. 사랑해요.우리가 젊어있을 시간,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