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인류연재 10화

루시드폴 좋아하는 여자

by 준혜이

우리는 오, 사랑이었다. 아니, 이어폰을 꽂고 내 옆에 앉아있는 남자가 지금 듣고 있는 노래가 오, 사랑이다. 좋은 노래는 유행을 타지 않지만 세월에 서툴고, 어렸던 우리의 순수는 어른이 된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생각해보면 너를 만나던 시절의 하루하루는 모두가 긴 밤들이었던 것만 같다. 너와 함께 있던 날보다 너를 생각하며 혼자있던 밤들이 유난히 길게 느껴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뒤틀린 시간은 여전히 그대로다.

"가을 끝에서 봄의 첫날을 꿈꾸는"심정을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하다. 너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만큼 네 곁에서 더 멀리 떨어져 걷고 있던 나였으니까. 혼자 너를 그리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시작되는 진짜 너를 찾는 모험에 지쳐갈 무렵 알게 되었다. 가을의 끝과 봄의 첫날 사이의 긴 겨울을.

내 옆에 앉아있는 이 남자도 루시드 폴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의 노래가 내 귀에 들릴 정도로 크게 듣고 있으니 말이다. 이 남자는 지금 눈을 감고 어느 시간, 어느 장소로 가고 있는 걸까. 다음 역은 신도림이다. 나는 내려야 한다.

머뭇거리기에 우리 청춘은 짧고 그러지 않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굳지 않다. 머뭇거림없이 너를 사랑하고 싶었지만 이제야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가 틔운 싹은 자랄 수도, 죽을 수도 없었다.

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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