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물리에 Feb 27. 2024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火山のふもとで




식물리에 추천


1. 느긋한 휴식이 서툰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급한 성격으로 하루 일과가 늘 바쁜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천천히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인색하고 또 어색하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 쉬지 못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때가 온다. 그러면 모처럼 여유 있게 쉬어보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역시 느긋하게 쉬는 것은 너무 어렵다.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한다. 이 책이라면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사실 진짜 쉬려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건 정말 불가능하다) 문장마다 차분하게 놓여있는 감정과 생각을 따라가 보자. 격정적으로 뾰족한 그래프를 그리던 마음이 어느샌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차분해질 것이다. 



p.27
모든 유리창이 열리고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여름 별장이 천천히 호흡을 되찾아간다.



2. 계수나무의 매력을 알려주고 싶을 때 권하는 책


이 책은 무라이 건축사무소가 여름마다 도쿄를 떠나 사무실로 이용하는 여름별장을 배경으로 다양한 자연의 장면들이 묘사된다. 화산활동부터 연못의 반딧불이, 저마다 울음소리를 내는 새들과 나무들. 그중에 가장 자주 언급되는 것은 'ㄷ'자형 여름별장 가운데 심어져 있는 계수나무이다. 주인공 사카니시군의 감정에 따라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수나무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진다. 


계수나무의 잎은 하트모양에 손바닥보다 작은 사이즈로 꽤나 앙증맞다. 가을에는 노랗게 물이 들어 더 예쁘다. 그리고 낙엽에서는 달달한 향이 난다. 책을 읽는 내내 사계절 빛을 달리하는 풍성한 수형으로 계수나무의 모습과 향이 떨쳐지지 않는다. 누군가와 길을 걷다 계수나무를 만나면 늘 이 나무의 매력을 공유하고 싶어 지는데, 앞으로는 슬그머니 이 책도 함께 소개하려고 한다. 



노랗게 물든 계수나무 잎사귀



작가와 옮긴이에 대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건축사무소의 여름별장에서의 이야기이다. 건축과 관련된 이야기는 물론이고 직접 만들어 먹는 요리나 별장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새, 나무 등에 대한 묘사가 많다. 그리고 건축가로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 대한 생각, 결정을 내릴 때의 기준, 집과 건축에 대한 신념 등 일종의 철학적인 이야기도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건축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건축이란 단어를 글쓰기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고, 나는 조경이란 단어를 넣어서 읽었다. 


다양한 소재를 가볍게도 무겁게도 표현할 수 있고 평소 옳다고 믿는 생각을 책의 소재에 따라 부담스럽지 않게 전달하는 작가의 능력을 보며 감탄했다. 분명 건축가들에 대한 이야기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각자의 상황을 넣어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p.64
오전오후 합해서 최대 열 자루 정도 연필을 쓰는 것이 일의 정확성도 지켜지고, 연필도 정성껏 다루게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보다 더 깎아야 하는 것은 필압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난폭하거나 너무 서두르거나 그중 하나로, 즉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이 책의 원제는 '火山のふもとで(화산 자락에서)'이다. 이를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제목으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옮긴이가 했을 고민의 무게를 감히 짐작도 못하겠다. 내게는 두 제목 모두 묘하게 쓸쓸한 느낌이 드는 면에서 책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한국사람에게 화산은 잘 와닿지 않는다. 


반면에 한글 제목에 담긴 '오래도록 그곳에 남아있다'라는 표현은 꽤나 매력적이다. 심지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이 제목 자체가 마음에 진득하게 남아 책을 한 번이 아닌 두 번, 세 번 읽게끔 하는 이유가 된다. 아마 일본에서 이미 성공한 책의 제목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옮긴이의 결단과 감각 덕분에 책이 한국에서도 많이 읽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른 언어권에서는 제목을 어떻게 번역했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아쉽게도 영어나 다른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 혹시라도 아시는 분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너무 궁금해요!!


건축가에 대한 책을 읽으며 정원가에 생각을 하다 보니 작가와 옮긴이에까지 생각이 뻗치게 되었다. 예술가는 자신의 철학을 결과에 담아낸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건축가는 화가와 다르다. 화가는 고객이 없어도 그림을 그려내지만, 건축가는 고객 없이는 설계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 이 점에서는 정원가(정원디자이너)도 건축가와 같다. 하지만 이 두 직업도 어느 정점에서는 자신의 철학을 결과에 담아내고자 노력하기에 화가와 같은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책의 표지 / 출처 ; 교보문고 책 검색



p.142
여름 별장에 와서, 나에게 주어진 설계실 책상에 앉아서 맨 처음 생각한 것은 이 큰 유리창은 계수나무가 잎사귀를 활짝 펼치고 있는 가운뎃 마당 경치를 보기 위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계수나무의 황록색 잎사귀는 날이 맑든 흐리든 밝고 경쾌하다. 둥근 모양의 잎사귀를 내려다보면 살짝 부유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계수나무


Cercidiphyllum japonicum

계수나무과 계수나무속 

낙엽 활엽 교목, 암수딴그루

중국과 일본 원산으로 한국에서도 자생

잎은 하트모양으로 노랗게 물들며, 달콤한 향이 난다. 



p.331
계수나무는 모든 잎사귀가 구석구석까지 빛나는 황금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산들바람도 없는 가운데 석양빛을 받은 잎사귀는 주위의 소리를 빨아들인 것처럼 조용하다.



누군가 내게 이 책이 마음에 남는 가장 큰 이유 하나를 물으면 망설이지 않고 계수나무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가라앉아 있다가 계수나무를 볼 때마다 다시 떠오른다. 그래서 다른 책들보다 더 자주 생각나는 책이다. 


'ㄷ'자 모양의 여름별장 가운데에 심겨 있는 계수나무는 별장의 첫인상이기도 하고 2층의 사무실과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시간이 흘러 별장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지만 계수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별장을 지키고 있다. 


작가가 왜 하필 계수나무를 소재로 했을지 궁금하다. 지금 당장은 모르겠다. 책을 여러 번 더 읽게 된다면 언젠가는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또 책을 읽을 구실을 남기며, 여름별장의 것처럼 멋지게 자란 계수나무를 언젠가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로 동요 '반달'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가사에 나오는 계수나무는 이 계수나무가 아니다. 중국에서는 목서(물푸레나무과 목서속)라는 나무를 계수나무라고 불렀고, 달에 계수나무가 있다고 믿었던 중국 전설이 한국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그 이름이 그대로 넘어 온 것이라고 한다.


이전 12화 내 방의 작은 식물은 언제나 나보다 큽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