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맛집을 찾아다니는 유형은 아니지만, 독일에 가면 독일 현지의 맥주만큼은 이름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꼭 한번 즐겨 보고 싶었다. 근래에는 국내 맥주도 다양하게 출시되는 것이, 전통 수제 맥주와 같은 맛을 내는 경우가 많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크** 맥주를 위시로 한, 물맛 나는 몇 가지 맥주가 맥주 시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영국 출신의 담당 교수는 한국 맥주를 폄하하면서 북한의 '대동강 맥주'가 더 훌륭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그는 평양의 김일성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맥주를 즐기던 한국인으로서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럼에도 차마 반박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지금도 나는 맥주 하면 변함없이 독일을 떠올리게 된다. 그건 짝꿍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행을 가기 전부터 독일 맥주에 독일의 대표적 음식인 '학센'과 '슈니첼'을 곁들여 한 끼를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분위기 있게 맥주 한 잔을 하기 위해서는 저녁 시간대를 활용하는 것이 최적이었는데, 문제는 해가 질 무렵이면 체력이 바닥난다는 것이었다. 특히 아이들은 그제쯤이면 얼른 호텔방으로 돌아가 뒹굴거리기를 절실히 원했다. 그리하여 기실은 맥주 마시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지만, 독일식 소시지와 족발의 맛(맛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으면서)을 미끼 삼아 아이들을 우리가 염두에 둔 장소까지 이끌고 가야 했다.
그리하여 맥주 한잔을 위해 제일 처음 가게 된 곳은, 짝꿍이 제안한 '아우구스티너 켈러'였다. 독일어로 켈러(Keller)는 '지하 창고'를 뜻하는데, 맥주 브랜드에 '켈러'라는 명칭이 들어간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이유다. 짝꿍의 말로 이곳은 관광객들에게 꽤 알려진 곳이라고 했다. 짝꿍과 아이들의 뒤통수를 쫓아가던 끝에 마주한 가게의 겉모습은, 기대 이상으로 낭만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일단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그러나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에서 도저히 맥주를 마실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오래된 양조장을 개조해 만든 가게는, 속칭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사람들이 빼곡해 온전히 정신을 차리고 있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간신히 자리를 찾아 앉긴 했으나, 일렬로 길게 자리 잡은 좌석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거의 맞부딪다시피 앉아야 했고, 개인적 공간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말소리로 인한 소음도 심해 가족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홀 서빙을 하는 직원도 어느 손님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고, 메뉴판 하나 부탁할 틈을 찾기도 어려웠다. 이왕 들어온 것, 열악한 환경을 버티고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 하나 고민되던 중 딸램이 말했다.
"너~무 시끄러워. 나 여기서 도무지 밥 못 먹겠는데!"
딸램의 한 마디가 촉진제가 되었고, 우리는 혹여나 직원이 메뉴판을 던져 주기 전에 얼른 그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도망 나오다시피 후다닥 자리를 떴다. 결국 이날은 호텔에서 컵라면과 주전부리를 먹는 것으로 마지막 한 끼를 대충 해결했다. (관광객에게) 소문난 독일 맥주 가게의 북적임은 무시무시할 정도였고, 그렇게 우리의 낭만적 목표는 물 건너가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그냥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2차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이번 장소는 내가 적극 추천한 곳이었다. 이름하여 '호프브로이 켈러'. 사실 원조격인 '호프브로이 하우스'를 가고 싶었다. 모차르트와 바그너 등 명망 있는 예술가들이 찾았던 곳이었기에 더욱 낭만적 장소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호프브로이 하우스' 대신 '호프브로이 켈러'를 찾은 이유는, 가게가 시내 중심가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에 덜 붐비리라는 기대가 있었고, 현지인들이 더 많이 찾는 곳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는 밤의 트램을 탈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멀미 대왕인 딸램도 멀미가 전혀 나지 않는다고 칭찬해 마지않았던 그 트램 말이다.
변두리에 위치한 곳이었지만 '호프브로이 켈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호프브로이 켈러까지의 짧은 여정은 현지인의 생활 속으로 더 가까이 들어가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개성 있는 가게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눈에 담으며 드디어 그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기울고 어여쁜 가로등불이 가게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손님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실내 공간에는 지난밤 도망쳐 나왔던 '아우구스티나켈러'보다 훨씬 깊은 여유가 흐르고 있었다. 웃음 꽃망울을 머금은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덩달아 기분이 상승되었고, '이제야 제대로 낭만을 만끽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절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마음에는, '짝꿍보다 내 제안이 더 좋았다.'라는, 은근한 경쟁심리에서 오는 자부심도 곁들어 있었던 것 같다.
아랍계로 보이는, 친절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는,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직원이 가져다준 메뉴판을 살펴보고, 맥주와 독일식 족발인 학센, 수제 소시지, 슈니첼과 독일식 김치라고 불리는 '자우어크라우트'를 주문했다. 독일 시골 농가를 연상시키는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스멀스멀 스며 나오는 만족감에 마음을 내맡겼다. 곧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시원한 독일 맥주와 현지 음식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가며, 아이들과 그날의 일과 다가올 여정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드디어 고대하던, 낭만적 기품이 깃든 한 끼가 시작되었다.
시원하고도 달콤한 목 넘김의 독일 맥주에 뽀글뽀글 거품 기둥이 솟아오르고, 달콤 쌉싸름한 '자우어크라우트'와 곁들여진 학센은 그저 눈앞에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피곤함과 불확실성을 넘어 맞이한, 먹어보지 않으면 두고두고 미련이 남을 것 같았던 요리들은, 물리적 포만감 이상의 그 무엇을 우리 안에 새겨주었다. 낭만의 독일 맥주 한잔이 식도를 시원하게 타고 내려간 뒤 절로 터져 나온 '캬~'소리가 잠잠해질 때쯤, 윤기 좔좔한 학센과 수제 소시지가 허기진 속을 부드럽게 채워주었다. 한국의 김치와는 또 다른 자우어크라우트의 오묘한 맛과 식감은,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내며 특별한 한 끼를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흡입하다시피 맥주의 첫 잔을 들이켜며 거의 동시에 짝꿍과 내가, 마치 심야 시간 맥주 광고 속 모델처럼 탄성을 내뱉었다. 국내에서도 독일산 캔맥주는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으나, 독일 현지에서 마시는 독일 맥주는 그 고유한 맛을 배가시켜 주는 듯했다. 그것은 비단 맥주의 맛 그 자체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리라. 자고로 한잔의 술에는 그 맛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분위기라는 것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일 테니.. *'맥주 순수령'을 제정 공포한 바이에른에 오기로 한 우리의 결정을 칭찬해 주고 싶은 순간이었다.
우리는 독일을 맥주 강국으로 만든 이곳 바이에른에서, 평범한 일상을 마무리하며 느낄 수 없었던, 한 잔의 맥주에 최적화된 분위기를 마음껏 들이켰다. 그렇게 뮌헨에서의 밤이 깊어갔고, 우리의 뺨은 점점 붉어져 갔다. 창밖으로는 판타지 동화 속에 등장할 법한 형광빛 달이, 깊은 바다 가운데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걸린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1516년에 바이에른에서 제정 공포된 '맥주 순수령'은, 맥주에 물, 보리, 홉만 사용해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으로, 당시 맥주의 위생과 품질을 보호하는 보호막이 되어주었고, 결과적으로 독일 맥주가 세계적 신뢰를 얻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