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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Oct 25. 2024

14. 나는 나의 세계에 닿고 싶다

그가 말을 걸어온다.
“너의 세계는 무엇이냐?”


아침은 언제나 똑같다. 눈을 뜨자마자 단조롭게 울려 퍼지는 알람 소리가 귀를 때리고,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의 할 일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눈부신 햇살이 벌써 창밖에 가득하다.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뜨거운 아침 공기 속에서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본다. 어제도 보았던, 하루도 다르지 않은, 뿌연 도심의 회색빛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복사 붙여넣기라도 한 듯, 같은 날이 반복되는 듯한 이른 아침. 이 익숙한 장면 속에서 나조차 엑스트라로 느껴진다. 뭐,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전까진 별반 다를 게 없는 일상일 테니까.


오늘은 조금 달랐더. 아침 햇살처럼 선명한 알람 소리와 달리, 머릿속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 기묘한 질문 하나. 마치 뜻하지 않게 문 앞에 도착한 택배처럼, 준비할 틈도 없이 도착한 생각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일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도 그 질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늘 마음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질문이지만, 오늘따라 여름 햇살처럼 유난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듯이. 차가운 커피가 입안에 맴도는 동안, 질문은 더 뚜렷해졌다.


이 질문이 어디에서 온 건지 생각해보려 애써도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질문을 억지로 무시해보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다. 끈질기게 반복되는 광고 음악처럼, 머릿속에서 맴돈다.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걸을 때마다 심연 속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어떤 무게가 더해지는 듯하다.


문득, 소크라테스가 떠오른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 지독한 질문들,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졌던 그 철학자. 끝없이 이어지는 그의 질문에 그때 사람들도 나처럼 속으로 “도대체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야?”라고 생각했겠지. 그는 결코 단순한 호기심으로 묻지 않았다. 그의 질문은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눈을 감고 살아온 현실에 대한 도전이자,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그의 질문들을 ‘산파술’이라 불렀다. 산파술이라니, 이름도 참 묘하다. 마치 질문을 던질 때마다 진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듯한, 깊이 감춰진 지혜처럼 느껴진다.


생각은 여름날 나무 그늘 아래에서 뻗어나가듯 깊어졌다. 그의 물음이 남긴 흔적, “내가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답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 답을 찾게 만들기 위함이다.” 이 말이 어렴풋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결코 답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 마음속에 질문이라는 씨앗을 뿌렸고, 그 씨앗은 각자 마음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지금 내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 물음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는 나에게도 질문이 던져졌다. ‘이 길이 진짜 내가 원하는 길일까?’ 이 질문은 내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무게로 자리 잡은 이 질문, 이제는 대답을 찾아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답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반복되는 이 길 위에서, 진정 내가 찾고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약속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여름 공기처럼 무더운 생각이 머릿속을 채운 채 친구와 마주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결국 그 질문을 꺼내고 말았다.


 “요즘 들어… 내가 걷는 길이 진짜 맞는 길인지 자꾸 헷갈려. 매일 아침마다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가볍게 넘길 수가 없어서 계속 신경이 쓰여.”


친구는 내 말을 듣더니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네가 좀 예민해서 그런 거 아니야? 솔직히, 우리 같은 사람들이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 하루하루 살기도 빠듯한데, 무슨 길이 맞고 아니고를 고민해? 우리야 뭐, 다들 비슷하게 그냥… 사는 대로 사는 거지.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있어? 안그래도 더워 죽겠는데…더 끈적거리는것 같다. 야.”


친구의 반응에 잠시 멈칫했다. 내겐 단순히 흘려보낼 수 없는 생각이었기에, 그저 ‘예민해서’란 말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주저하며 다시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좀 다르게 느껴져. 마치 그 질문이 머릿속에 박힌 것처럼 떠나질 않아서. 내가 이 길을 진짜 선택한 건지 아니면 그냥 따라가는 건지 모르겠어.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정작 내가 진짜 원했던 건 잃어버리는 거 아닐까 싶어서…”


친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소 귀찮다는 듯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진짜, 철학적이네. 듣기도해도 피곤하다. 사람들 다 대충 살아. 일하면서 돈 벌고 살다 보면 고민할 시간도 없다고. 인생이 뭔지도 모르겠는데,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겠어? 그런 생각 하다 보면 시간만 가. 그냥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지, 무슨 길 타령이야?”


친구의 현실적인 답변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내 질문은 그저 감정의 사치이자 불필요한 예민함으로 여겨지는 듯했다. 그렇다고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내는 것, 그것도 맞는 말일 테니까. 그러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 질문을 그렇게 쉽게 흘려보내기엔… 내게는 너무나 무겁고 깊은 물음이 되어버렸다.


친구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고민할 시간 있으면 돈이나 더 벌고 싶은 게 현실 아니겠냐? 인생이란 게 원래 답이 없는 거야. 어차피 돌아보면 다 비슷비슷한 거고, 지금 네가 있는 자리가 맞는 거 아닐까? 됐고, 나 이제 간다. 나중에 또 봐.”


커피잔을 내려다본다. 친구에게는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전부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이 질문이 삶 그 자체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여름의 끈적한 더위처럼 머릿속에 남은 그 질문은 발걸음 하나하나를 무겁게 따라왔다.


무거운 발걸음에 온몸이 녹아내려 아스팔트 위에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질문은 한 번 불어오면 결코 멈추지 않는 바람과 같다. 한여름의 바람처럼 가볍게 다가왔다가도, 때로는 뜨겁고 강하게 우리를 휘감는다. 낙엽이 바람에 휩쓸리듯, 질문이 시작되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이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이 바람을 한 번 맞으면,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다. 질문은 우리가 숨겨왔던 생각들을 흔들어 깨우고, 잃어버린 감각들을 되찾게 한다. 모든 것이 익숙해질수록, 그 질문은 새로운 길로 나아가라는 미묘한 신호가 된다.


몇 년전 전 세계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팬데믹이 세상을 멈추게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물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상은 우리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 질문들은 그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일자리를 잃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사람들, 오랜 시간 묻어둔 열망을 다시 발견하게 된 사람들. 그 질문들은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열망을 일깨웠다.


질문은 단순히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외면해왔던 길들을 돌아보게 하고, 선택하게 만드는 도구다. 답이 없을지라도, 그 질문은 우리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익숙함 속에 묻혀 있던 길들이 그 질문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이다. 그 물음이 던져지는 순간, 우리는 더 나은 자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매일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때일수록, 그 질문이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이끌어줄지 모른다. 아침마다 창밖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그 질문 하나로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게 다가온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의 이 물음에 답하는 방법을,

그리고 나의 세계에 닿는 방법을


저 멀리서 그가 웃으며 다시 묻는다.
 “너의 세계에 닿을 수 있느냐?”


여름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더위 속에 묻혀 있던 시간들이 저물어가고,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또 다른 계절이 다가온다.

이제는 그 질문과 마주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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