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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라는 착각

by 나린

사랑이라는 말 뒤에는 종종 '구원'이라는 단어가 따라붙곤 한다.

누군가를 사랑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따뜻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착각이 되기도 한다. 특히 그것이 연인의 상처에서 비롯된 마음이라면 더더욱.


신의 사랑은 늘 희생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예수가 인간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졌듯,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마음.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사랑의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간의 사랑은 신의 사랑처럼 완전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내어주고, 때로는 그 사람의 삶을 붙잡아 주는 순간들을 만든다. 그럴 때 잠시나마 누군가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신이 인간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 그 마음과 조금은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인간의 사랑이 완전하지 않듯, '구원'이라는 단어 역시 언제나 위험을 품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단어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도 너무 쉽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쌍방 구원 서사'처럼.


사랑이 구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단어가 정말 우리의 사랑이라는 관계에 어울리는 말이었을까?




한때 사랑하는 이의 상처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마치 스스로를 지옥에 가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져가는 그를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온 힘을 다해 껴안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깊은 연민과 함께 '나만이 그를 이해하고 구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일었다. 구제와 구원의 감정이었달까.

나는, 그의 구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동정에서 시작된 연민이었다. 그를 위해 울었지만 결국 나만 지쳐갔다. 그가 불쌍해 보이는 순간, 사랑은 이미 다른 이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구원이 나의 파멸이 되고, 우리의 파멸이 되어가던 그때야 깨달았다. 사람은 사람을 온전히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이란 누군가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곁에 함께 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그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을. 그의 상처와 그림자까지도 안아주는 그 마음 말이다.


사랑 안에도 동정과 연민은 있다. 타인을 향한 안타까움.

그 역시 애정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마음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마, 이 연민의 감정을 사랑과 가장 쉽게 혼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구원이라는 착각에
사랑은 무너지고,
다시 피어났다.
파멸의 끝에서야
사랑은 제 빛을 찾았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통해 타인을 구원하려 하지만,

사실은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게 되는 건 아닐까.

결국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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