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창가에 서서 커튼을 젖히니 밤새 내린 눈이 꽤 쌓였다. 차의 지붕에 쌓인 눈인지, 거리에 쌓인 눈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온통 하얀 세상.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도 실컷 할 수 있을 정도로 눈이 쌓였다. 그럼에도 눈은 여전히 펑펑 쏟아지고 있다. 조용한 폭죽, 숨죽인 팝콘처럼, 눈은 '펑펑' 지상으로 지상으로 내려앉는다.
출퇴근을 하며 일상을 꾸리는 어른이 된 내게, 눈 내리는 모습이 어릴 때처럼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눈이 내리면 일단 걱정은 잠깐 뒤로 둔 채 기쁨이 앞선다. 예순을 넘긴 부모님도 눈이 내리면 여전히 설렘을 느끼시는 걸 보면 '눈'은 인간의 감정을 정화시켜 주기 위한 신의 축복일지도 모른다.
늦은 아침을 먹고서도 설렘이 가시지 않아 서점을 핑계로 남편과 집을 나섰다. 눈 내린 거리를 걸어 서점에서 책 구경을 마치고 아이들에게 줄 소소한 간식을 사들고 아파트 단지로 돌아오는 길. 정오가 다 되어가는 때, 어느덧 눈이 잦아들고 햇살이 환히 빛났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지어진 지 오래라 지하주차장이 없다. 덕분에 아파트 단지에 주차된 모든 차량 위엔 눈이 가득 쌓였다. 차량 앞 보닛 곳곳엔 어린아이들이 눈을 뭉치느라 남긴 손자국이 정겹고, 몇몇 주민들은 집 밖을 나와 차량 상태를 확인하고 차량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손길이 분주하다.
몇몇 주민들의 눈 치우는 모습에 나도, 남편도 우리의 차량이 문득 궁금해졌다. 아직 여유가 있는 일요일 정오인지라 천천히 주차된 차를 찾아가 본다. 역시나 우리 차량도 눈이 수북하게 쌓여 번호판만 간신히 보인다. 시무룩해 보이던 우리 차량은 주인의 등장에 꼬리 치는 듯, 자신의 등허리 위로 쌓인 눈으로 햇빛을 발랄하게 반사시킨다.
자동차 가까이에 다가서자 남편이 조수석 문을 연다. 내게 간식상자를 쥐어주며 들어가 있으라 한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남편이 하자는 대로 순순히 조수석 자리에 앉는다. 간식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시 있으려니, 남편이 트렁크를 연다. 아마 남편은 트렁크에서 도구를 꺼내 차량에 쌓인 눈을 치울 모양이다.
나는 얼른 차량의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동안 차량의 눈을 치울 때면 항상 나도 함께 하곤 했다. 함께 해야 힘든 일이 더 빨리 끝날 것이므로. 그래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밖으로 나가 함께 눈을 치우려고 대뜸 손잡이부터 찾고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남편의 배려를 한껏 즐기는 것도 그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잡이에 올렸던 손을 내려놓고 조수석 의자에 느긋하게 온몸을 기대어 앉았다. 조수석의 온열 기능도 틀어놓았다. 따뜻한 기운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남편이 눈을 떨구어낼 때마다 '사각사각', '서걱서걱' 들려오는 소리가 안온한 리듬감으로 날 감싼다.
남편은 차량의 꽁무니부터 눈을 치우기 시작해 옆면을 따라 돌아서 차량의 앞 유리창 눈을 치우기 시작한다. 남편이 앞 유리창의 눈을 덜어낼 때마다, 남편의 모습도 안개가 걷히듯 조금씩 드러난다. 처음엔 추운 날씨에 눈을 치우느라 벌겋게 되어버린 두 맨 손이, 다음엔 숨 쉴 때마다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입김이, 그리고 그다음엔 빨갛게 언 코끝이 안쓰럽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남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 밖에서도 들릴 수 있게 차창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들을 때마다 노래 제목의 의미가 뭘까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노래. 바로 조용필의 <장미꽃 불을 켜요>였다. 어릴 때는 이 노래를 들으며 차가운 우주 공간에 떠도는 장미꽃 모양의 붉은색 조명들을 상상해보곤 했다.
사랑의 꿈을 꾸고 있는 그대,
밤이면 별들과 얘기를 해요.
때론 가슴에 혼자만의 바람 불어
따뜻한 사랑이 그리워져요.
그대의 아름다운 눈 밤하늘 속에서
꿈꾸는 어린 왕자 자리를 찾아.
부부는 어쩌면 서로에게 '어린 왕자'와 '장미꽃'이 아닐까 생각해보곤 한다. 온전한 세계, 하나의 별을 지키는 두 존재. 서로 도움을 줄 때도 있고 도움을 받을 때도 있으며 잠시 곁을 떠나 있어도 그립고 그리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 노래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덧 남편은 앞 유리창의 눈을 다 치운 뒤 다른 쪽 옆면을 돌며 눈을 치워내고 있었다. 덕분에 환하게 걷힌 앞 유리창으로 부부 한쌍이 지나가는 모습이 선명하다.
빙판길을 종종걸음으로 걷던 부인이 미끄러져 균형을 잃고 신랑의 점퍼 자락을 붙잡는다. 그녀보다 키가 훌쩍 큰 신랑은 허허 웃더니 장난스럽게 부인의 점퍼 뒷덜미를 한 팔로 덥석 잡아 위로 끌어올린다. 점퍼의 뒷목이 위로 쭉 당겨졌다. 마치 어미 사자가 새끼의 목덜미를 물고 이동하듯, 신랑은 부인의 목덜미를 바짝 들어 끌어간다. 신랑의 장난에 웃는 부인, 부인의 웃는 모습에 더 크게 웃는 신랑. 눈이 꽝꽝 얼어붙은 빙판을 건너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장미꽃 불을 켜요.
어두워진 가슴마다
사랑의 꿈 나눠줘요
노래의 후렴구를 들으며 그 부부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무엇인가가 마음속에서 꿈틀댄다. 팝콘 터지듯 생각이 뒤집히며 깨달음이 온다. 그렇다. 장미꽃은 우주 어느 머나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함으로 가득한 자리, 바로 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임을 알겠다. 작은 관심, 따뜻한 말 한마디, 서로를 위하는 행동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온기로 데워지면, 그 장미꽃에 자연스레 불이 켜지는 것이다.
나는 남편을 위해 노래의 볼륨을 더욱 높였다. 내가 간절히 들려주고 싶었던 그 노래가 밖에서 눈을 치우던 남편에게도 잘 들렸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지금 이 순간 남편은 내 마음속 '어린 왕자 자리를 찾아 장미꽃 불을 켜주었다'는 사실이다. 나를 조수석에 앉히고 홀로 눈을 치워준 배려는 오늘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었으니까.
아마도 이런 나뿐 아니라, 나를 배려해 준 남편의 마음에도, 장난스럽게 빙판길을 걸어갔던 두 부부의 마음에도 사랑 가득했었으리라. 흰 눈 펑펑 쏟아지는 겨울이지만, 타오르는 붉은빛으로 우리 가슴에 그 온기 서려있었으리라. 각자의 마음에 장미꽃 불이 환히 켜졌으리라. 이렇게 장미꽃 불이 환히 켜져 있기만 하면 북풍이 몰아쳐도, 얼음이 꽁꽁 얼어도, 그 어떤 추위와 겨울에도 우리는 따스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그렇다, 오늘의 설렘은 펑펑 쏟아진 눈 때문만은 아니다.
'장미꽃 불이 켜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이 순간, 진정 설렌다. 살맛 난다.
장미꽃 불을 켜요 (작곡 조용필, 작사 김선진)
사랑의 꿈을 꾸고 있는 그대
밤이면 별들과 얘기를 해요
때론 가슴에 혼자만이 바람 불어
따뜻한 사랑이 그리워져요
그대의 아름다운 눈 밤하늘 속에서
꿈꾸는 어린 왕자 작은 별 찾아
장미꽃 불을 켜요 어두워진 가슴마다
사랑의 꿈 나눠줘요 언제나
노을에 물든 저녁 하늘 보면
어쩐지 슬퍼져 눈물이 나요
가끔 혼자서 바람 속을 걷다 보면
따뜻한 사랑이 필요해져요
그대의 아름다운 눈 밤하늘 속에서
꿈꾸는 어린 왕자 작은 별 찾아
장미꽃 불을 켜요 어두워진 가슴마다
사랑의 꿈 나눠줘요 언제나
『조용필 13집 The Dreams』
마침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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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조용필 크리스마스 앨범 LP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