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고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 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p.156)
장편을 잘 쓰는 사람이 단편을 못 쓸 수는 있어도 단편을 잘 쓰는 사람은 장편도 잘 쓴다더니 맞나 보다. 나는 장편을 좀 더 선호하는 편인데 한때는 정말이지 소설집은 읽기가 힘들었다. 그런 나에게도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는 무척 인상 깊어서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는 소설집이다. 그런 최은영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니 어떻게 안 읽을 수가 있나.⠀
<밝은 밤>은 지연과 엄마 그리고 할머니 또 증조모까지 4대에 걸친 인생 이야기다. 직장을 옮기고 희령으로 가게 된 지연은 이혼 후 고통에서 혹독하게 헤쳐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그곳에서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가 소원해 추억이라곤 어린 시절 잠깐뿐이지만 다시 따뜻한 시간을 보낸다. 할머니와 증조모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 일제강점기부터 히로시마 원자폭탄, 6.25로 인한 피난생활 등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이야기는 흐른다. 동시에 지연과 엄마도 억눌러왔던 아픔과 감정들을 끄집어 내 아프도록 부딪치는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간다. 결국은 지연도 엄마도 할머니도 각자의 아픔을 꺼내 내보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그것이 관계의 새로운 시작으로 보였는데 그 관계란 것이 너무 지나치게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너만 그런 거 아니라고. 나도 다 안다고. 괜찮다고. 다 지나간다고. 지연이 그랬듯이 읽는 나도 다독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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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되기만 한 삶에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존재들이 있었다. 바로 친구다. 비단 여성 인물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증조부에게는 새비 아저씨, 증조모 삼천에게는 새비 아주머니, 할머니 영옥에게는 희자, 엄마 미선에게는 명희, 지연에게는 지우라는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4대에 걸친 여성의 삶을 조망한다는 것이 가장 두드러져 보이지만 결국에 살아가게 하는 건 사람 간의 작은 연대, 사랑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찼고 나에게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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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성인이 될 때까지 할머니와 살아서 그런지 읽으면서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많은 식구들 배곯지 않게 하려고 일본에 건너갔던 할아버지도 생각났다. 이제는 이렇게 한국사를 포함한 다양한 세대의 이야기를 하는 소설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기보다는 애써 써야지만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이 더 반가웠다. 4대에 걸친 여성들이 겪어낸 각자의 아픔, 혹독하게 거쳐온 인생, 그리고 서로의 아픔이 부딪치고 깨지는 과정을 읽으면서 아마 많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장편 소설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얘길 들어서 난 내가 화가 나도 슬퍼도 죄책감이 들어. 감정이 소화가 안 되니까 쓰레기 던지듯이 마음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때그때 못 치워서 마음이 쓰레기통이 됐어. 더럽고 냄새나고 치울 수도 없는 쓰레기가 가득 쌓였어.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도 사람이야. 나도 감정이 있어. (p.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