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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미 Dec 13. 2022

세대가 교체된다.

"할머니, 미안해."


임신 8개월 때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훤칠한 키에 풍채가 좋은 호인이셨다. 특유의 굵직한 동굴 목소리는 마치 천둥의 울림과도 같았고, 사자왕처럼 위엄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할아버지의 존엄해 보이는 인상과 카리스마는 얼굴 정가운데에 우뚝 솟아 올라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엄한 코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코는 필시 조상님 대대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서양인과 혼인을 맺은 분이 분명히 계실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는 그런 코였다.


엄마가 아빠와 결혼하려고 했을 때, 당시 가난한 형편이었던 아빠를 할머니께서 극구 반대하셨지만 “남자는 눈빛이 중요하다. 눈빛이 살아있더라.” 라며 할아버지만큼은 아빠를 믿어주셨다는 일화와, 신부 입장 직전까지도 “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라며 놀라운 집념으로 결혼을 반대하셨던 외할머니로 인해, 눈물을 펑펑 쏟던 엄마의 손을 할아버지께서 굳건히 꽉 잡아 주셨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나는 할아버지가 무조건 좋았다.


약주를 즐겨 드시던 할아버지는 늘 인자한 미소를 짓고 계셨다. 젊은 시절의 전성기를 뒤로 하고 점잖고 여유롭게 노년을 맞이하는 이상적인 예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극을 하며 오로지 나에게만 몰두해 살아가고 있을 때 명절에만 가끔씩 외가댁에 들르면, 그때마다 할아버진 눈에 띄게 수척해지셨다. 윤기 흐르던 피부는 점차 푸석푸석 빛을 잃어갔고, 당당하게 펼쳐져 있던 넓은 가슴은 점점 오그라들었다. 발음이 몹시 어눌해지고, 걸음걸이가 위태로워지시더니 얼마 못가 주무시거나 앉아계시는 모습만 보다가 돌아오는 날이 잦아졌다. 언제나 단정하게 빗겨져 있던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는 모습을 봤을 때, 그리고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미소가 거두어지고, 나로선 감히 그 깊이를 헤아리지 못할 회한과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걸 발견했을 때 마음이 아팠다.

늙음이란, 노쇠함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낯설어졌다. 그럴 때면 종종 사진첩을 뒤적였다. 갓난아기였던 나를 넓은 품에 안고 껄껄껄 웃고 계시는 생기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왠지 안심이 됐다.


거동이 완전히 불가능해지실 때 즈음 할아버지는 요양 병원에 입원하셨고, 엄마와 함께 종종 병원을 찾았다. 언제 잡아봤는지 기억에 없는 할아버지의 손과 발을 만져봤다. 아기처럼 보드랍고 뽀얀 빛깔이었다. 누워계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은 흐릿하게 남아있지만, 그 감촉만큼은 내 손끝에 또렷하게 남았다.


할아버지는 앙상하게 말라갔고,

내 배는 점점 불러오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생은 시들어가는 중이었고,

내 뱃속엔 새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은 할머니로 가득 차있다. 그때를 떠올리면 내 곁엔 늘 할머니가 있다. 방문을 잠그고 엄마 몰래 사탕을 잔뜩 먹곤 했던 우린 환상의 콤비였다.


할머니와 함께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좋았다. 밤 9시 50분부터 시작하는 연속극을 보기 위해 따뜻한 이불 속에 들어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설레는 맘으로 다음 회를 기다렸다. 하루의 끝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꿀 같은 여가 생활 중 하나였다. 할머니는 사극을 좋아했다. <일월>, <한명회>, <조광조>, <장희빈> 등을 함께 보면서 할머니는 “하하하! 아이고, 웃어 죽갔다!” 라거나, “저런, 망할 년!”이라고 화를 내면서 드라마 속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을 했다.

연속극이 다 끝나면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6.25 전쟁의 생생한 피란 스토리는 그 어떤 연속극보다 더 극적이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보다 더 흥미진진한 온갖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할머니는 팔과 손바닥을 부드럽게 만져주거나 두피를 살살 간지려 줬다. 그러면 하루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스르르 풀리며 잠이 솔솔 쏟아졌다. 때로는 이부자리에서 서로를 간지럼 피며 숨 넘어가도록 웃다 지쳐 잠들기도 했고, 새벽에 깨서 촛불을 켜 놓고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두 손바닥 싹싹 빌며 기도하는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잠든 날도 많았다.


네 살 때 동네에서 세발자전거 타는 아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할머닌 그 아이에게 잠깐만 빌려달라 해서 난생처음 자전거를 탈 수 있게 해 줬고, 철봉에서 놀고 있는 큰 언니, 오빠들 대여섯 명에게 다가가 손녀딸에게 양보해줄 수 있냐고 묻고는, 나 혼자 철봉을 점령하고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곤 했다.


봉숭아 꽃을 보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한 여름날 저녁 식사를 마치면 할머니는 낮에 잔뜩 따왔던 봉숭아 꽃을 백반과 함께 절구에 넣고 나무 방망이로 열심히 찧었다. 그리고 규격에 맞게 자른 비닐봉지 여러 장과 기다랗게 자른 명주실을 준비해 놓고, 짓이겨진 봉숭아 꽃을 조금씩 떼어 내 손톱 위에 올려놓은 후, 봉지로 감싸 실로 칭칭 감았다. 느슨하게 감으면 자는 동안 봉지가 빠져서 이불에 물이 들고, 손톱 끝 색깔도 흐리멍덩하니 예쁘지가 않았다.

“할머니, 좀 더 꽉!”

그러면 할머니는 정말 꽉 감았는데, 실이 감겨 있는 열 손가락 전체에서 내 맥박이 뛰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음 날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손가락 끝이 시원해진 느낌에 잠에서 깨면, 할머니가 실을 풀고 있었다. 그러면 나도 완전히 깨어나 간밤의 손끝 마법을 확인했다.

“좀 더 시커매야 이쁘지.”

할머니는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한 번 더 인고의 밤을 보내면 비로소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손 끝이 화려하게 물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유년시절 내 단짝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학교에 찾아오는 할머니가 창피하게 느껴졌던 건. 

분명 반가웠었는데. 언제부턴가 내 마음은 그렇게 됐다. 

차마 할머니에게 말할 수 없었던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이제 비 와도 할머니가 안 왔으면 좋겠어. 친구랑 갈래. “

그때부터가 사춘기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내 마음은 할머니에게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그 상처는 이후의 모든 관계 맺음에서 어려움을 겪게 했다. 더불어 시작된 성적 및 진로 스트레스는 나를 매일 같이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것만 같았다. 그런 가운데, 수시로 내 동의 없이 방 청소를 해서 물건의 위치를 바꾸어 놓고, 심지어 버리기까지 하는 할머니에게 너무 화가 났고,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하던 그때 더 이상 함께 자지 않는다고, 말수가 적어졌다고 섭섭해하는 할머니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사춘기 이후부터 20대 초중반까지 쭉, 내 주위로 벽을 단단히 세워놓고, 오로지 나의 세계 안에서 젊음의 치기 어린 고뇌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나’의 성적, ‘나’의 친구, ‘나’의 가치관, ‘나’의 신념, ‘나’의 장래희망, ‘나’의 진학, ‘나’의 커리어, ‘나’의 연애, ‘나’의 자아. 

나! 나! 나!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할머니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내 결혼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던 할머니의 치매는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기를 낳은 후 내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에도 할머닌 아무것도 모르고 요양원에 계셨다.


죽음의 터널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던 그 해 추석, 할머니가 친정 집에 오셨다. 아기는 낮잠을 자고, 할머니와 단 둘이었던 오후,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할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할머니의 피부결과 주름, 솜털, 맥없이 축 쳐진 머리카락, 어렸던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만지작 거렸던 귓불, 너무도 투명해진  -초점이 불분명한- 눈동자.

찬찬히 정성 들여서 내 눈에 담았다.

세월의 흐름과, 그것이 변화시킨 모든 것들에 가슴이 미어졌다.


“할머니, 나 죽을 뻔했어. 알아?”

“응, 응.”

"내가 할머니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갈 뻔했다고."

"응, 응. 하하하하!"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 상체를 좌우로 흔들며 미소를 띤 채 공허하게 대답했다.

어릴 때 생떼를 부리다 울음을 터뜨릴 때면 할머닌 웃으면서 뜨겁고 억센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곤 했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들어 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할머니는 여전히 시계추처럼 몸을 흔들며 웃고만 있었다.

 

“할머니, 미안해, 미안해. “

“응, 응.”


*


아기가 첫돌을 맞이하기 닷새 전, 할머니는 96년이라는 세월을 뒤로하고 이 생을 떠나셨다.

노란색 호박 바지를 입은 내 딸이 할머니의 장례식장을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그렇게 꽃이 피고, 지고-

세대가 교체된다.




외할아버지와 나 / 할머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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