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무 칸이나
나는 시간을 허투루 쓰는 걸 잘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 아침마다 집에서 강남역까지 가는 출근길마저 작은 타임어택 게임처럼 여기곤 했다. 집을 나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발걸음, 승강장에 들어서면 몇 번째 칸에 타야 환승역 계단이 가장 가까운지 미리 계산했다. 환승역에 내리자마자 강남으로 가는 2호선, 그곳에서는 다시 가장 빠른 동선을 떠올렸다. 강남역에 도착해서도 출구를 향해 잠깐의 망설임 없이 걷고는 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왠지 모르게 살이 더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리듬은 어느 날 갑자기 멈췄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음 직장과의 사이, 예상치 못한 공백이 찾아왔다. 알람은 여전히 울렸지만, 이제는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도, 어디 급히 갈 필요도 없었다. 어느 날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지하철을 탔고,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무런 계산도 없이 지하철 아무 칸이나 무심코 올랐다. 몇 번째 칸인지, 환승 구간이 얼마나 빠를지 따지지 않고, 그저 눈앞에 오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어보니, 스마트폰 대신 눈에 들어온 건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풍경들이었다. 지하철 벽에 붙은 익숙한 광고, 하나둘 스쳐가는 역 이름,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 이상하게도 그 익숙한 풍경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도 늘 저렇게 분주한 걸음으로 하루를 통과해왔구나 싶었다.
그 순간, 이유 없는 울컥함이 밀려왔다. 왜 나는 매 순간을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만 채우며 살아왔을까. 왜 시간은 늘 목적을 가져야만 의미 있다고 믿었던 걸까.
그 후부터 나는 조금씩 연습을 시작했다. 달리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속에 머무는 법,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받아들이는 법. 공백이라 불렸던 그 시기의 시간은 생각보다 다채롭고 말랑했다. 철저하게 짜인 스케줄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작고 느린 장면들이, 그 느슨한 시간 안에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낯섦과 여유, 그 사이에서 나는 조용히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효율을 사랑하는 사람이겠지만, 지금만큼은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아마도 이렇게 천천히 걸어본 시간들이, 다시 달릴 나를 준비시켜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순간들이야말로 내가 가장 많이 회복되던 시간이었다는 걸 기억하게 될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