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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잊고 살던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by 허군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
시계는 여전히 같은 속도로 흐르고
햇살은 커튼 사이로 조용히 들어온다.


나는 멈췄지만,
세상은 조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책상 위에 엎어진 알림장,
냉장고 옆에 붙은 오래된 메모,
잊고 있던 찻잔의 얼룩.


그 모든 것들이
나를 기다린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이제야 보인다.


서랍을 열면
반쯤 남은 건전지와
몇 해 전 기념품 동전이

나란히 누워 있다.


버릴까 고민하다가
잠시 멈춘다.

그 안에 묻힌 시간들이,
그리 간단히 지워지지 않는다.


집은 조용했고
나는 처음으로,
그 조용함을 들었다.


베란다 창틀 위
먼지 너머로 스민 햇빛은
무언가를 비추고 있었다.


내가 지나쳤던 자리,
내가 외면했던 시간,
그리고 내가 그토록 서둘러

지나온 하루하루.


이제는 조금 느리게 걷는다.
시계를 보지 않고

청소기를 돌리고
탁자 위 먼지를 쓸어낸다.


아들이 떨어뜨린 장난감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기도 한다.


지금은 그저 이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퇴사란,
일을 멈추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던 것들과

다시 마주하는 일.


나는 지금,
그 조용한 일들을
하나씩, 다시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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