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했던 사람, 마지막까지 따뜻했다
퇴사를 결심한 그날 아침, 출근길은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매일 걷던 길인데 그날따라 모든 풍경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핸드폰은 주머니에 넣어둔 채, 이어폰도 끼지 않았다. 그냥 머리를 비우고 걸었다. 무언가를 곱씹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꾸만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고 시선은 땅에 박혔다. 마음속 어딘가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회사에 도착해 아침 회의가 끝날 즈음, 나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님의 책상으로 향했다. “팀장님, 잠깐 면담 가능하신가요?” 그렇게 말을 건네자, 팀장님은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시며 “그래, 회의실로 가자”라고 말씀하셨다.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였는데, 그 짧은 순간조차 나는 어딘가 뭉클했다. 그렇게 회의실로 걸어가는 내내 마음속에선 수십 번 되뇌었던 그 한 문장이 회전목마처럼 계속 떠올랐다.
회의실에 들어가 팀장님과 마주 앉았다.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고, 미리 연습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팀장님, 저 이제 그만하려고요. 퇴사하기로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말이 끝나는 동시에, 팀장님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천천히 지워지고,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변화는 아주 작았지만, 나는 그 흔들림을 분명히 봤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조용히, 아주 느리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입자들이 중력을 되새기듯 바닥으로 천천히 내려앉는 느낌. 둘 사이에 있던 시간도, 소리도, 움직임도 잠시 멈춘 듯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뒤, 팀장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팀장으로서 네가 지금 이렇게 퇴사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그 말이 가슴 깊은 곳에 닿는 순간, 예상하지 못한 감정이 갑자기 솟구쳐 올랐다. 그동안 수없이 시뮬레이션했던 시나리오는 이런 게 아니었다. ‘갑자기 무슨 퇴사냐’, ‘업무 인수인계는 어떻게 할 거냐’는 다그침을 각오했는데, 정작 돌아온 건 진심 어린 미안함이었다. 그 한마디에 내가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겁게 올라온 감정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동시에 쏟아지고 있었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했습니다’… 그 모든 감정이 얽히고 얽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마음 한가운데에 고여 있었다. 나에게 팀장님은 단순한 상사가 아니었다. 존경했고, 많이 배웠고, 정말 따랐던 분이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과연 내가 팀장의 자리에 있었다면 퇴사를 고민하는 후배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따뜻하게, 그렇게 품어줄 수 있었을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회사를 떠났고,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의 회의실을 종종 떠올린다. 그 몇 초간의 침묵, 그 한마디 말, 그리고 마음속 깊이 남은 울림. 팀장님은 내게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분이었다. 따뜻하게, 조용히, 단단하게. 멘토란 꼭 화려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흔들릴 때 끝까지 사람다움을 잃지 않고 곁에 있어주는 존재라는 걸, 그분을 통해 배웠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그날의 장면을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살 것 같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의 퇴사를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 된다면, 그때 오늘의 이 회의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를 앉혀두고 조용히 “미안하다”라고 말해줬던 팀장님의 목소리, 그 한마디에 담긴 책임감과 배려, 그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 언젠가 나도 누군가를 그렇게 배웅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조용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