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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첫 월요일

알람 없는 아침.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by 허군

알람 소리가 울리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원래대로라면 휴대폰에서 익숙한 벨소리가 울리고 부스스한 머리로 집안 여기저기 분주히 오갔을 텐데 오늘 아침은 다르다. 더 자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시계를 확인하게 되는 이상한 아침이었다. 그리고 문득 오늘 회사에서는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메일은 또 몇 개쯤 쌓였을까, 그런 쓸모없는 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침대에 다시 누워 한참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커튼을 열고 커피를 내렸다. 오늘은 미팅도, 마감도, 회의도 없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곳도 없다. 그냥 우두커니 거실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낮이 되자 집에만 있기 답답해서 아무 목적 없이 집 근처 스타필드에 다녀왔다. 별다른 계획은 없었다. 그냥 집 밖으로 나가야 할 것만 같았다. 천천히 쇼핑몰을 둘러보다가 나와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 겨울 햇살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햇살이 반쯤 내려앉아 그림자를 만들고, 그 사이를 걸을 때마다 내 몸에도 따뜻한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었다.


전에는 이런 길을 걸을 때, 뭔가에 쫓기듯 종종걸음을 했던 것 같다. 스타필드에 가더라도 후다닥 사야 할 것만 사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하루.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숨이 더 가벼웠고, 다양한 곳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처음 생긴 것 같았다. 그제야 ‘아, 내가 퇴사했구나’ 실감이 났다.


오늘 하루는 아주 오래 잊고 지냈던 나 자신을 천천히 다시 불러내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나를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여유가 생각보다 깊게 파고들었다. 오늘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그래서 조금 자유롭고, 그래서 조금 낯설게 따뜻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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