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손에 좌우되는 생명과 죽음

인공지능 시대에 생명과 죽음 3, 영화 <유혹의 선>

by 박인조
“간단히 말해서 사후를 알고 싶어서야. 철학도, 종교도 모두 실패했어. 이제 과학의 손에 달린 거야. 인류는 알 권리가 있어.” - 영화 <유혹의 선>(Flatliners) 중에서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습니다. 특히 뇌 과학의 발달로 인간 뇌의 물리적 기능이 밝혀지면서 미지의 세계로 남겨져 있던 인간 뇌가 신경세포 간의 물리적인 상호작용과 호르몬의 화학적 반응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세포체(cell body), 수상돌기(dendrite), 축삭돌기(axon)로 구성된 뉴런(neuron)이라고 하는 1,000억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됩니다.


이 뉴런은 온몸의 감각기관과 뇌 사이에서 신경정보를 분자 구조로 된 신경전달물질 형태로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 만들어내는 뉴런과 뉴런의 연결부인 100조 개의 시냅스(synapse)에서 지능, 감성, 기억 등이 정해집니다.

(그림-증강현실을 통한 본 인체 내부)

이런 인간의 뇌에 의식의 중단을 결정하는 스위치로 알려진 클라우스트룸(claustrum)이라고 부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계의 오작동을 대비한 비상정지 장치인 킬 스위치(kill switch)와 같은 기능을 하는 클라우스트룸은 인간의 뇌를 작동하는 뇌의 한 부분입니다.

두뇌 피질의 모든 부분과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어 ‘가시왕관 뉴런’이라고도 부릅니다.


모하메드 쿠베시(Mohamad Koubessi)는 뇌전증 치료법을 찾기 위해 환자 뇌에 전기 자극을 주고 반응하는 범위를 검사하다 우연한 발견을 합니다.

54세 환자에게 잡지를 소리 내어 읽게 하고 뇌의 한 부분에 전지 자극을 주었는데, 그 순간 환자의 모든 행동이 일시 멈췄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전기 자극을 중단하니 다시 움직였는데, 환자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스위치로 알려진 클라우스트룸(claustrum) 가설을 입증하는 최초의 발견이었습니다. (이미솔 외, 『4차 인간』(서울: 한빛비즈, 2020), 65-74.)


생명과 죽음을 넘나드는 선

영화 <유혹의 선>(Flatliners, 미국/1990)의 영어 제목인 ‘Flatliners’는 사람이 죽었을 때 모니터에 심장박동 선이 일직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출처: 영화 <플랫라이너> 장면 캡처)

제목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의대생들은 의료기기를 사용해 잠시 죽는 경험을 합니다.

의대 수업을 듣다 의학으로도 밝혀내지 못한 죽음 이후의 세계와 인간의 의식의 변화에 대한 깊은 호기심에 이런 시도를 합니다.


이런 비밀을 자신이 밝혀내겠다는 욕망 때문이기도 한데, 이 영화는 이후 <플랫라이너>(Flatliners, 미국/2017)로 리메이크됩니다.


영화는 주인공 넬슨의 “오늘은 죽기가 좋은 날이군”이라는 대사로 시작합니다.

평소 사후 세계에 관심을 갖고 있던 넬슨은 공사가 중단된 건물 내부에 의료 장비를 가져다 두고 동료의 도움을 받아 죽음 이후를 경험하는 시도를 합니다.


먼저 주사제를 통해 심장을 멈추게 해 죽은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잠시 후 약속대로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흉부압박과 인공호흡을 통해 살아납니다. 사실 죽었다기보다는 심장이 잠시 멎은 상태라고 하는 게 맞겠지요.

그 잠깐 사이에 일어나는 의식의 변화를 기록으로 남겨 관찰하는데, 일명 근사 체험(Near-Death Experience)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장이 멈춘 순간의 경험은 특별했습니다.

자신이 몸이 병원 밖으로 나와 하늘을 나는 체험, 자신의 시신과 주변의 동료들을 공중에서 바라보는 경험, 그리고 밝고 따뜻한 빛 등을 경험합니다.


제일 먼저 시도한 넬슨은 죽는 순간 넓고 아름다운 들판을 뛰어가는 좋은 경험에 이어 무엇인가 불편한 경험을 하고 깨어납니다. 이후 이 실험에 도움을 주었던 동료들도 죽는 경험에 참여합니다.

여러 여성과 관계 가지는 것을 즐기는 조, 응급환자를 처치하다 정학 처분을 받고 학교생활에 회의를 느낀 데이비드, 그리고 근사체험을 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하며 이야기를 자주 듣던 레이첼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이 체험 이후, 환영이나 환청에 시달립니다.

죽는 순간, 과거 누군가에게 잘못했던 그 순간으로 또는 그 일로 어떤 사람이 죽는 순간을 다시 마주합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을 때는 내내 그 영향으로 일상에서 고통을 겪습니다.


정상적인 삶이 무너질 정도의 심각한 상황에 놓이는데, 문제는 단지 꿈과 같은 환상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피해를 입는다는 점입니다.


죽음 경험 이후, 레이첼은 자살로 죽은 아빠에 대한 죄책감이 몰려옵니다.

데이비드는 예전에 자신이 괴롭히던 소녀에게 이제는 그대로 자신이 고통을 당합니다.

자신과 성관계 영상을 찍었던 여인이 현실에 나타나 조를 괴롭힙니다.


그리고 넬슨은 자신이 어렸을 때 괴롭혔던 빌리에게 폭행까지 당합니다. 일상을 제대로 살 수 없을 정도의 혼란에 고통은 점점 더 커져만 갑니다.


인간이 주장할 수 없는 죽음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런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다행이도 현실 세계에서 그 때 그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하고 나서는 괴롭히던 공포로부터 벗어납니다.

의과대학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자퇴하려던 데이비드는 자신이 괴롭히던 소녀를 찾아가, 이제는 결혼을 하고 자녀를 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먼저 죽은 이들의 경우입니다.

그래서 결국 넬슨은 다시 죽음 체험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괴롭혔던 빌리와 화해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일상의 삶에 안정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이런 대사를 읊습니다.


오늘은 죽기 좋은 날이 아니군.


생명공학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맞이하게 될 세상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무한히 연장하는 것은 물론, 죽음을 통제해 죽고 사는 것을 인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림-렘브란트, <해부학 강의>, 1632년)

그런데 삶을 인간의 의도대로 주장할 수 없듯이, 죽음은 더욱 인간이 조종할 수 없는 영역의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때와 장소 그리고 그 이유와 과정을 제대로 알 수 없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한없이 욕심을 부리며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해하면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지난 삶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나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하지 못한 일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인간이지요.

그러나 때로 인간 삶에 있어서 후회라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을 위한 하나의 동기가 됩니다. 실수를 통해 성장하고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더 기울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후회가 끊이질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것은 인간자체가 가변적인 존재이고 인간의 삶은 불확실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늙어가며 신체적으로만 아니라 정신과 의지적으로도 점점 나약해집니다. 주변에 널려있는 수많은 변수들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나이가 들면서 더욱 힘들어집니다.


사실은 원래부터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한 사건은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지만, 이미 지난 일은 바꿀 수 없고 또 앞으로의 일들이 내가 원하는 데로 움직인다고 보장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아쉬운 것은 죽음을 앞둔 순간에야 가장 중요한 것의 가치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은 죽음에 직면함으로 지난 삶을 돌아보고 가치 있는 앞으로의 시간을 전망합니다. 인간이 죽음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할 수는 없지만, 죽음에 대한 의식과 경험은 일상에 변화를 만듭니다. 죽음은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삶의 대부분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이어지듯이, 죽음도 그 관계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람의 죽음과 그와 관련된 사건이 일상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영향을 까칩니다. 그래서 이기적이고 욕심에 굴복한 오만한 행동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음에 몰리기도 하고, 반대로 한 사람의 헌신된 죽음이 새로운 생명과 삶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죽음으로, 후회와 원망의 삶은 아쉬움과 불안을 동반한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삶과 죽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생각할 때마다 오늘, 이곳에서 그리고 함께 하는 이들과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만일 내가 지금 나의 죽음 이후를 보았다면, 나는 오늘 어떤 결정과 선택 속에 오늘의 삶을 살게 될지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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