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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Apr 03. 2021

봄비

얌전히 즐긴 토요일 틈새



거의 한 달 만에 여유 있는 토요일, 비가 온다. 아우성이던 벚꽃이 비를 핑계 삼아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다 결국에는 아스파트 위로 휩쓸려 다닌다.

"아이고, 아까운 것."

시엄니는 지는 벚꽃이 내내 안타깝다. 그냥 피었다 마냥 지는 벚꽃이 떼어 먹힌 돈처럼 아쉬운 모양이다. 계절의 도망이 칠십대에게는 그렇게 안쓰러운가 보다. 벚꽃을 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 테니.



나는 비 오는 날을 얌전히 즐기는 편이다. 눅눅한 공기, 창에 맺혀 번지는 흐림, 젖음. 젖는다는 건 촉촉해지는 것. 들뜨지 않고 가라앉는다. 주말에는 등산 그리고 영화보기 외에는 하지 않는 남편은 이미 영화에 폭 빠져 있는 상태라, 권유하지 않고 차를 몰고 근교 카페로 드라이브를 나간다.



카페모카를 시켜 놓고 비 오는 바다를 바라본다. 빗방울이 불러들인 스멀스멀한 안개가 파도를 다독인다. 흐릿하지만 아릿하다. 사람의 얼굴도 감정에 따라 여러 표정이 있는 것처럼 바다도 날씨에 따라 여러 개의 표정이 있고 지금 바다는 이유 없이 슬픈 날인 것 같다. 그리운 사람이 오지 않는 날의 마음을 닮은 표정. 기가 죽었다.



흐린 날에는 모든 존재가 자신을 잠잠히 드러낸다.

내 안의 언어와 비 언어들조차 소란스럽지 않다. 그 세계가 안온하고 충만해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다. - 시와 산책(한정원)



평일은 미친 듯이 소란스럽게 살지만 주말은 대부분 거의 정지화면으로 지내는 걸 좋아한다. 그중 좋아하는 행위는 바라보기다. 이런 날의 바라보기, 비 오는 바다를  깊이 응시하는 것, 흐릿한 창밖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일은 그녀의 말대로 안온한 일이다.



바라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것. 바다 일수도 있고 빗속에 처연하게 있는 연분홍 꽃일 수도 있고. 평일 어느 날 누군가에게 준 상처 일수도 있다. 카페모카 한 잔으로 입을 적시며 그냥 애틋하게 바라본다. 상념을 잠재운다. 바라보기는 <놓아두기>에 가깝다.



그대로 나를 잠시 놓아두기.



지금 몰두하는 것에 너무 많이 휩쓸려 가지 않기를,

어깨에 앉은 짐을 많이 매달고 가지 않기를,

완벽하려 하지 않기를,

욕심부리지 않기를.



나라는 사실조차도 생각하지 않기.


비,

나무 한 그루,

먼바다.



비는 계속 내렸고 카페모카는 거품만 남았다. 바다는 조금 울음을 그쳤는지 잠잠해졌고 벚꽃나무의 여린 잎들은 기운차게 뻗었다. 창에 머문 물방울들은 흐릿하게 나를 감추었다. 봄은 가고 여름이 올 것이다. 자연의 방향은 반대로 갈 수 없으니. 그래도 봄이 없다면 여름은 결코 오지 못하는 일, 자연스러운 일은 자연스럽게 맞이 해야 한다.



진심이나 맹세는 흐린 날에 건져야 할 것 같다.

햇빛은 사랑스럽지만 구름과 비는 믿음직스럽다.

-시와 산책(한정원)



나를 놓아두기만큼 믿음직스러운 일은 없다. 나를 놓아두면 내가 나를 톡톡 건드리니까. 비가 오는 동안 내가 모르는 것들은 한 뼘 더 자랄 테고 그만큼 나에게 용기가 생겼을 거라고. 굳이 용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달걀 한 판 정도의 여유는 챙겼을 거라고.



부러 우산도 쓰지 않고 티 나지 않게 천천히 걸으며  나무처럼 쓰윽 비를 맞아보기도 괜찮은 날. 아직은 더 자라야 할 것 같아 비를 맞아 보기도 하는, 나는 아직 덜 여문 사람이다.



바다도 제 집으로 파도를 불러들였는지 조용하고

사람도 제 집에서 소란을 잠재운 탓인지 도로가 한적하다. 음악 볼륨을 높여 <모든 날, 모든 순간>의 음률 속으로 뒤따라오는 약간의 아쉬움을 자른다. 비는 점점 거세어진다. 창가 소리는 거세어도 노곤 하게 잠들기는 좋을 것이다. 집으로 천천히 그리고 여리게 액셀을 밟는다.


비 오는 날은 꿈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들기를.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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